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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서울 동숭동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연출가 추민주(왼쪽)와 소설가 김애란. 12년 지기 친구인 두 사람은 장르는 다르지만, 각자의 작품에서 공통적인 외부인의 시선으로 서울을 낯설게 바라보면서, ‘바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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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칼자국’ 원작자 김애란·연출 추민주
옷 개어주던 12년지기 뭉쳐
국수 썰던 엄마 향한 사모곡
연출가가 직접 무대서 요리
2000년대 초 어느 날 서울 이문동 고시원에 있는 한 연출가 지망생의 방엔 빨래 널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는 빨래를 들고 옆 건물, 친구의 자취방 문을 두드린다. 친구는 햇볕 잘 드는 옥상에 빨래를 널고, 마른 옷을 곱게 개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예쁘게 접힌 빨래에 그는 떡볶이로 보답한다. 상도 없는 자취방 바닥에 떡볶이를 놓고 먹었던 두 사람.
“살면서 누군가에게 햇빛이나 옥상을 빌려주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이전엔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때 괜히 뿌듯하고 기뻤던 기억이 나요.”(김애란)
“빨래 모양이 너무 예뻤어요. ‘아, 애란이는 빨래를 이렇게 개는구나’ 인상적이었죠.”(추민주)
지난 2005년 초연 이래 지금까지 공연을 이어 오며 관객 25만여명을 모은 창작 뮤지컬 <빨래>의 연출가 추민주(36)씨와 2005년 첫 단편집 <달려라 아비> 이후 평단과 관객에게 두루 사랑받아온 소설가 김애란(31)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99학번 동기다. 빨랫줄과 떡볶이를 나누던 연출과·극작과 대학생에서 주목받는 예술인이 된 두 친구가 공연장에서 만난다.
추씨는 30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서울 서교동 산울림 소극장에서 열리는 ‘단편소설입체낭독극장’에 김애란 원작의 <칼자국>을 연출해 내놓는다. ‘단편소설입체낭독극장’은 소설가 김애란, 김연수, 김미월씨의 단편으로 만드는 ‘낭독 공연’이다. 작품마다 배우 2~3명이 소설 전체를 읽는데, 소설에 없는 대사가 들어가거나 무대 연출이 더해진다. <칼자국> 외에도 김연수씨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과 김미월씨의 <서울동굴가이드>가 무대에 오른다.
<칼자국>은 김애란의 2007년 단편집 <침이 고인다>에 실린 작품. 엄마의 장례식장에 온 딸이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내용이다. 딸은 큼직한 칼을 들고 칼국수를 만들어 내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보며 커 온 자신을 담담히 불러낸다. 김씨가 “엄마를 향한 사모곡의 느낌으로 썼다”는 이 작품에 대해 추씨는 “시치미를 뚝 떼고 거리를 두면서 엄마 이야기를 하는 태도”가 매력적이라고 했다. 추씨는 지난해 가을, 성기웅 연출가와 함께 단편소설입체낭독공연을 구상하면서 ‘당연히’ 김씨를 먼저 떠올렸다. “애란이는 스무 살 때부터 문장이 청신했어요. 빛났죠. 99년부터 매력 있는 글을 읽어 온 ‘팬심’으로 애란이 작품을 (연출)하고 싶었어요.”(추민주)
추씨는 김씨의 단편들은 물론, 최근 나온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까지 모두 챙겨 읽었다고 한다. 김씨도 추씨의 팬이긴 마찬가지. “<빨래>를 언니(추민주)의 졸업 작품으로 처음 보고, 그 뒤로도 네 번 넘게 봤어요. 엄마랑도 보고, 소설가 선배도 데려가고.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선물로 보여주고 싶었죠. 볼 때마다 ‘울컥’하는 게 있어요.”(김애란) “그렇게 많이 봤어? 몰랐어.”(추민주)
<칼자국> 무대에는 연출가 추씨도 등장한다. 배우들이 낭독하는 동안 무대 한편에서 소설 속 엄마처럼 칼국수를 끓이는 것. “5분이면 만드는 칼국수”지만 이번엔 70분 공연 내내 육수를 끓이고, 반죽을 하고, 채소를 썰고, 김치도 담근다. 완성된 음식은 배우와 관객이 같이 나눌 생각이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야겠다는 느낌이 직관적으로 들었어요. 서툰 솜씨지만요.” 김씨도 추씨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나 소설은 냄새를 줄 수가 없는데, 후각적인 감각은 연극이란 형식에서만 줄 수 있는 선물인 것 같아요.”
요즘 공연 준비에 한창인 추씨는 출연배우 이정은, 최보광씨와 함께 대본을 읽고 칼국수를 먹으며 엄마의 딸로, 독신 여성으로, 딸의 엄마로 겪은 자신의 경험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연 중간에 세 사람의 이러한 ‘리얼 토크’가 포함될 예정이다. 다음달 1일 공연 뒤에는 소설가 김씨가 원작자로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참여한다. 극작과 출신인 김씨에게 자신의 희곡을 언젠가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바람은 “부끄럽고 소중하게 간직한 꿈 중의 하나”다. 그 꿈을 이루기 전, 자신의 소설을 무대로 옮기는 친구의 시도가 “반갑고 기대된다”고 했다. 친구의 말에 추씨는 “결과물이 좋아야 할 텐데”라며 수줍은 미소를 보냈다. (02)764-7462.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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