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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화원대전’에 나온 단원 김홍도의 1776년 작 <군선도>(위 도판). 세간에는 풍속화로 유명하지만, 단원은 원래 신선 그림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세 무리로 나뉜 신선 19명이 바람에 옷자락 휘날리며 물을 건너가는 장면을 박진감 넘치는 필력과 담백한 색조로 그려낸 그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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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미술관 ‘조선화원대전’
간송미술관 ‘풍속인물전’ 등
조선 회화사 훑는 전시 풍성
‘나가수’무대는 대중문화에만 한정된 히트 상품은 아니다. 소슬한 올 가을 문화재동네에도 ‘나가수’를 방불케하는, 명품 전시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부를 겨룰 참이다. 전통그림의 대가들과 그들의 걸작, 그리고 후학 연구자들의 글까지 어우러져 벌이는 내공의 대결이다.
중박-리움-간송 3파전
이미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은 지난달 27일 조선시대 초상화들을 두루 망라한 ‘초상화의 비밀’전(11월6일까지·02-2077-9000)을 개막하면서 치고 나갔다. 인근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은 13일부터 조선시대 궁중화가(화원)들의 다채로운 명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조선화원대전’을 펼치게 된다. 여기에 16일 한국미술사의 보루로 불리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가을 기획전 ‘풍속인물’을 시작한다. 국내 최고의 미술사 명가인 3대 컬렉션이 잇따라 옛 그림을 놓고 ‘나가수’ 삼파전에 돌입한 양상이니, 애호가들로서는 유례없는 명품들의 릴레이 성찬에 홀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초상화의 비밀’전과 간송미술관의 인물풍속화전이 일종의 ‘테마 콘서트’라면, 리움의 조선화원대전은 ‘명품 버라이어티쇼’라고 할 수 있다. 리움의 ‘조선화원대전’(내년 1월29일까지, 02-2014-6900)은 2006년 조선말기회화전 이래 5년만에 선보이는 고미술 전시다. 사대부 문인화가들과 더불어 조선시대 그림 역사를 움직이는 쌍끌이 축이었던 궁중 화원들의 명품들을 리움을 포함한 국내 주요 소장기관에서 그러모아 조명한다. 화원들 그림을 두 갈래로 나눠, 궁중에서 그린 공식 행사도·기록도와 일반 사대부 가문의 주문을 받거나 스스로 즐겨 그렸던 풍속화, 산수화, 꽃·짐승 그림, 신선도 등의 일반회화로 가른 이 기획전은 전시장 전체가 명품들의 숲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들머리 궁중 십장생 창호 그림과 19세기말 태극기 든 군사들이 따르는 고종황제의 행렬도인 <동가반차도>로 운을 뗀 뒤, 말미 성풍속도 춘화 모음으로 갈무리되는 동선이다. 그 사이 곳곳은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오원 장승업, 이명기 등 거장 화원들의 눈부신 명화들이 명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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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의 대표작인 <미인도>(왼쪽)와 오원 장승업의 고양이 그림인 <유묘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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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법을 응용해 전시장에서 아이폰 터치 패드 방식으로 생생하게 작품을 실감할 수 있는 것도 이 전시의 미덕이다. 거대한 궁중 기록화나, 우리 회화사상 가장 긴 그림인 이인문의 관념산수 걸작 <강산무진도>의 주요 장면들을 작품 앞에 설치된 이미지 기기를 터치하면서 확대해 볼 수 있게끔 배려했다. 전시 말미 컴컴한 골방에 살창 틈으로 비밀스런 명화들을 엿보는 재미(?)는 직접 본 관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전시도록에 이례적으로 국내 주요 회화사학자 9명의 글을 망라해 각 학파별로 논문의 ‘나가수’대결을 이끌어낸 점 또한 색다르다. ‘인물풍속화’ 자유로운 화법 눈길 16일 개막하는 간송미술관의 인물풍속화 전(30일까지·02-762-0442)은 우리 눈길에 친숙한 18~19세기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으로 대표되는 인물 풍속도의 요지경이 단연 눈길에 먼저 와닿는다. 18세기 문화황금기 풍속도를 등장시킨 사상적 배경이 16세기 율곡 이이가 집대성한 조선 성리학이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을 내세워 기획된 이 전시는 풍속화의 비조로 뜻밖에도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을 지목한다. 그의 산수 풍경화 곳곳에 나타나는 조선적인 용모의 인물이나 이땅 특유의 풍속 장면 등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다. 겸재에 뒤이어 꼬장꼬장한 붓질로 인간미 어린 군상들을 묘사한 관아재 조영석의 풍속그림 등을 서두에 에피타이저처럼 내걸고, 후대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 등 풍속화 거장들의 걸작들을 차근차근 내보여 감상의 흥취를 점차 돋우는 얼개로 꾸몄다. 통속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혜원 신윤복의 화첩들이 빠질 수 없다. 두말할 필요 없는 혜원의 걸작 <미인도>가 3년만에 다시 나왔고, 오랜만에 간송이 내보이는 혜원의 춘화 <봄빛을 즐기는 과부> 등도 실물로 감상할 수 있어 눈을 동하게 한다. 뜰에서 흘레붙는 개 암수컷을 보고 볼이 발그레해져 주인 과부 마님의 치마폭을 손가락으로 꼭 움켜 잡는 계집종의 모습은 단연 압권이다. 세 전시의 구도에서 가장 눈길을 모으는 건 역시 초상화와 풍속화다. 초상화는 엄격한 형식과 묘사에 대한 사실주의적 강박이 있어서 경직된 이미지를 주기 쉽지만, 인물풍속화는 훨씬 화법이 자유롭다. 주변 배경 인물들의 복식 표정 등에서 당대의 시대성이 절절이 드러나 더욱 감상의 재미가 배가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나온 이명기의 <서직수>초상과 리움의 <오재순 초상>, 간송에 나온 이한철의 초상 그림, 간송과 리움에 각각 나온 단원의 풍류그림과 신선도 등을 서로 견주어가면서 보는 것도 좋다. 올 가을 즐거운 발품을 팔게 된 애호가들에게는 이 3대 컬렉션이 자존심을 걸고 벌이는 전시 대결의 성패 또한 관심거리가 아닐까. 글 노형석기자nuge@hani.co.kr·도판 간송미술관, 리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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