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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도쿄 모리미술관 전시장. 신작 <더 시크릿 셰어러> 앞에 선 이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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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작가 이불 일본서 회고전
일본 도쿄 도심의 고층복합시설인 롯폰기 힐스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모리타워 53층의 모리미술관(모리아트뮤지엄)이다. 지난 4일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미술관’이라는 이곳 본전시장 들머리 벽에 한국 설치작가 이불(48)씨의 초대형 포스터가 내걸렸다. 구슬과 은빛 실리콘으로 꾸민 히드라 같은 그림 아래 ‘이불-아시아 미술을 이끄는 여성 작가의 첫 대형 개인전’이란 제목이 붙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천장에는 거대한 고깃덩어리 같은 붉은 설치물이 매달려 있었다. 풍선 같은 몸체에 손과 발, 내장 같은 것이 튀어나온 혐오스런 모습의 설치물이다. 1990년 작가가 옷처럼 직접 입고서 김포공항, 일본 나리타 공항, 도쿄 거리를 활보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던 문제작이다. 뒤이어 크리스털 등으로 만든 내장덩어리, 샹들리에처럼 반짝이는 와이어 설치물, 다리 잘린 사이보그 등 파격적 작품들이 출몰해 관객들을 당황하게 한다. 팔다리 잘린 사이보그 등20년간 만든 대표작 전시
가치 전복 등 주제 돋보여
“변화를 향한 고민들 담겨” 이날 모리미술관에서 개막한 이불 작가의 회고전 ‘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5월27일까지)는 도발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도쿄국립신미술관, 산토리미술관과 함께 도쿄의 ‘아트 트라이앵글’(예술 삼각지대)을 이루는 일본 현대미술 심장부에서 일본 작가가 아닌 아시아 여성작가의 대형 초대전은 처음이다. 홍익대 조소과를 나온 이불 작가는 199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특별상을 받았고, 2007년 프랑스 파리 카르티에 미술관 개인전, 2008~2010년 샤넬의 세계 순회 아트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세계 미술계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펼쳐왔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지난 20여년 작업을 모았더니 작업 초기부터 고민했던 질문 맥락 안에서 (제가) 계속 움직여왔다는 것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순간적 존재’, ‘유토피아와 환상풍경’ 등 5개 주제로 나뉜 이번 전시에는 기존가치의 전복을 꾀한 초창기 퍼포먼스 작업을 비롯해 기계와 유기체가 뒤섞인 사이보그와 애너그램 조각 연작, 영원한 잠을 상기시키는 가라오케 캡슐공간 등 주요 대형작품 45점이 나왔다. 어린 시절 부모가 좌파 정치범으로 낙인찍혀 연좌제 그늘에서 자라면서 눈떴던 사회 비판의식, 인간 이상과 현실에 대한 지적인 탐구가 묻어나온다. 전시를 만든 이 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마미 가타오카는 “작가가 지금까지 보여준 도전정신은 일본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귀띔했다. 발길이 유난히 많이 머무는 곳은 <화엄> 영상작업. 1997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실제 생선 비늘에 반짝이 장식물을 달아 내놓았다가 악취 때문에 전시중 철거당해 파란을 일으켰던 바로 그 작품이다. 현대 미술관의 권위를 조롱한 이 작품이 영상작업으로 바뀌어 관객과 다시 만나게 됐다. 다른 편에는 설치작업의 밑바탕이 된 드로잉·모형, 도시 건축물로 유토피아를 표현한 조각 시리즈 등이 놓여 작업의 진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작가는 “초기 작업을 보니 (젊은 시절 내겐) 예술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며 “변화를 위한 방법을 찾고자 계속 질문하고 막연한 생각들을 어떻게 구체화할까 고민했던 것들이 보이더라”고 했다.
전시 마지막은 도쿄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창문 앞에서 반짝이는 개가 자리잡아 무언가를 토하는 신작 설치작품 <더 시크릿 셰어러>가 장식한다. 작가와 15년을 함께했던 늙은 개가 두해 전 먹은 것을 모두 게우고 죽은 체험을 바탕으로, 작가가 겪어온 젊은 날의 실체를 한꺼번에 펼쳐 보이려는 자성의 작업이다. “개들은 먹은 걸 소화시킬 수 없을 때 이파리 같은 걸 먹고 일부러 내보낸다죠. 저의 30~40대를 함께했던 개를 떠나보내면서 제 젊은 날의 마지막 부분을 매몰되는 기억 속에 남겨둘 게 아니라 정리해보자고 생각했어요. ” 그는 이 전시를 시작으로 아시아와 북미, 유럽 미술관에서 순회 회고전에 나설 예정이다. 도쿄/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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