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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청년시절의 아리미쓰 교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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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미쓰 교이치 특별전
일 교토 교려미술관서 개최
“아 손이 떨립니다!”
1946년 5월14일 경북 경주읍 노서리의 한 신라고분 발굴 현장에서 감격스런 일성이 터져나왔다.
돌무지 무덤 속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의 을묘년(415년 추정) 명문이 바닥에 새겨진 청동그릇 ‘호우’를 막 땅 속에서 허공으로 치켜올린 순간, 39살 일본 고고학자는 부들부들 떨었다. 한국 고고학의 첫 출발을 알린 역사적 발굴의 주역이 됐다는 기쁨에, 패전 뒤 포로처럼 붙잡혀 일하는 착잡한 감회가 뒤엉켜 그의 머리 속을 스쳐갔다. 그가 발굴한 무덤은 ‘호우총’으로 이름지어졌다.
지난해 103살로 타계한 일본 고고학 대가 아리미쓰 교이치(1907~2011)의 청년 시절은 경주 호우총과의 극적인 인연으로 획을 긋게 된다. 그는 한일 양국 학계에서 조선(한국)고고학의 선각자로 칭송받는다. 1931년 조선고적연구회 조수로 처음 일본에서 경주로 건너와 한반도 곳곳의 고대 유적들을 조사했고, 1941~1945년 조선총독부 박물관 주임(관장)을 지내다 해방을 맞았다. 김재원 초대국립박물관장은 당시 박물관 소장품과 고고발굴의 유일한 전문가였던 그의 귀국을 막고 발굴을 제안했다. 미군정청 문교부 고문으로 잔류를 명령받은 아리미쓰는 김 관장에게 평소 점찍었던 노서리 140호 고분을 추천했다. 국립박물관 첫 발굴은 그렇게 대박을 터뜨렸다. 김재원은 훗날 자서전에서 발굴 뒤 미군 지프에 그를 태워 부산 부두까지 바래다준 기억을 떠올리며 “가장 진실한 친한파”라고 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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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당시 아리미쓰가 참여한 경주 호우총 발굴현장과 조사단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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