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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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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인성 탄생 100돌 전시
1930~40년대 거장…38살 요절
서양미술 영향 속 치열한 작업
처음 공개되는 그림·자료 등 빼곡
1930년대, 조선의 화단에선 ‘향토색 미술’ 논쟁이 한창이었다. 강렬한 색채로 조선의 풍광과 조선 사람의 생활상을 그리는 ‘향토색 미술’에 대한 미술계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전통 회화의 연면한 흐름을 부정한다는 비판도 나왔고, 당대의 미술 이론가 근원 김용준 같은 이는 정반대로 향토색 시도를 조선 회화의 전통과 연결하며 긍정적으로 봤다. 조선 화가들의 자생적 노력이란 평가도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의도한 미술이란 시각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서양 미술의 세례를 받고 어느 정도 지난 시점에서 당시 많은 화가들이 향토색 그림에 매달렸고, 나름의 성과를 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향토색 시대 가장 돋보이는 결실을 거둔 화가가 이인성(1912~1950)이란 점은 이견이 없다. 보통학교(일제 시대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미술을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10대 나이에 주목받는 화가로 떠올랐고, 일본 유학 시절 ‘조선의 천재 소년’으로 불린 이인성은 한국 서양화의 성숙기였던 1930~40년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힌다. 하지만 겨우 서른여덟 나이에 요절한데다 작품들이 소장가들의 품속에서 나올 기회가 없어 사실상 ‘잊힌 화가’가 되기도 했다. 타계 이후 한참 지난 뒤에야 재조명되기 시작해 2000년 작고 50주기 전시회가 열리면서 비로소 ‘한국의 고갱’이란 별명과 함께 부활했다.
그렇지만 이인성은 여전히 가장 만나기 어려운 작가다. 작품이 많지 않고 쉽게 공개되지 않는 탓이다. 최근 새로 단장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이 첫 전시로 야심차게 마련한 ‘향-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는 이 접하기 힘들었던 작가를 12년 만에 제대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 제목에 붙은 ‘향’(鄕)은 그가 사랑한 고향 대구를 뜻하기도 하고 동시에 ‘예술적 고향’, 혹은 향토의 ‘향’이기도 한 중의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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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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