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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다방’으로 더 잘 알려진 ‘흑백’은 이중섭, 장욱진, 유치환, 김춘수, 서정주 등이 드나든 진해의 문화사랑방이었고, 해군과 젊은이들에겐 밀회의 장소였다. 지금도 전시·연주 공간으로 쓰이는 ‘흑백’에서 지난 12일 유경아 대표가 피아노 연주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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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랑’] 문화공간, 그곳
(11) 진해 ‘since 1955 흑백’
축제는 끝났다.
하릴없이 떨어진 연분홍 꽃잎은 점점이 여좌천 위를 흘렀다. 군항제(4월3~10일) 기간 동안 꽃잎과 인파가 열병처럼 진해를 휩쓸었다. 봄날은 간다. 꽃이 피고 지듯, 수십년 된 건물이 사라지고 새 빌딩이 불쑥 솟는다. 자본주의의 시간은 잽싸게 공간을 삼켜버리지만, 여기 수십년 동안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도 있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남쪽 군사도시로 건설된 진해 중원로터리에 ‘since 1955 흑백’이라는 간판이 서 있다. 아직도 이곳을 ‘흑백다방’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다. ‘흑백’은 일제가 1912년 건립한 국가지정사적 진해우체국과 비슷한 시기에 2층으로 지어졌다. 경남도가 건축물 유산으로 등재를 추진중인 이 건물은 한국전쟁 직후 고전음악 감상실 ‘카르멘 다방’으로 바뀌었다. 1955년 유택렬 화백이 인수해 무대공간을 증축하고 ‘흑백다방’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까치의 검고 흰 색에서 이름을 따왔다. ‘흑백’은 예술공간이 없던 진해에서 오랫동안 미술전시회, 연주회, 시낭송회가 열린 문화사랑방이었고 젊은이들과 해군들에겐 연인과 만나는 밀회의 장소였다. 군사도시 도심의 백년 된 건물
지금도 음악, 연극, 전시 공간으로
젊은 연인들은 밀담의 장소로
경남도, 건축물 유산 등재 추진중
축제는 끝났지만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12일 오후 5시 토요일을 맞아 문화공간 ‘흑백’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유 화백의 딸로 ‘흑백’ 대표인 피아니스트 유경아(49)씨의 무대다. 1시간30분 동안 베토벤의 3대 소나타 비창, 월광, 열정이 숨가쁘게 흘렀다. 관객은 30명 남짓. 깊고 뭉툭한 건반 두드림과 울림, 세월을 견뎌온 무게였다. 흑백의 건반은 추억의 음계를 밟고 쿵쾅쿵쾅 가슴속으로 걸어들어 왔다. 박수가 쏟아졌다. 먼저 연주자한테 쏟아 졌고, 다시 이 문화공간한테 쏟아졌다. 모두들 ‘가장 최근의 서울’을 따라 변해갈 때, ‘가장 진해다운 진해’로 남은 흑백의 아날로그 감성에 바치는 갈채였다. ‘흑백’은 뭘까. “50~60년대에는 유치환, 김춘수, 서정주, 설창수, 박재삼 등 문인들과 이중섭, 장욱진, 박고석 화가 등 예술인이 많이 다녀간” 곳이며 “젊은 군인들이 무의미한 군생활의 일상을 풀기도 했고, 젊은 연인들이 밀담을 나누는 장소”(수필가 차상주)였다. 무엇보다 이곳은 “안개비 내리는 늦은 밤 흑백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실내공간 가득 퍼지고 있는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선율”(화가 김병종)로 기억되는 고전음악 감상실이었다. 시인·작가에겐 영감의 자궁으로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시인 정일근)이며 “습작의 어려움을 위로받던 (중략) 내 소설의 시작점”(소설가 김탁환)이기도 했다. 기억속의 ‘흑백’ 말고 현재진행형의 ‘흑백’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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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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