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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2 17:06 수정 : 2005.11.03 14:46

노승림의무대X파일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역사상 최초의 정규 오케스트라는 1842년 창단된 오스트리아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다. 빈 국립 오페라극장을 근원으로 하고 있는 이 오케스트라는 아직도 세계 최초의 오케스트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해,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고 정규 단원조차도 빈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 단원 가운데 선출하고 있다.

이러한 빈 필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고 있는 오케스트라가 다음 주 내한하는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다. 1880년 독일 영주였던 벤자민 빌제에 의해 창단된 ‘빌제 카펠레’라는 악단이 그 모태이다. 그러나 군주제에서 산업화로 옮겨가는 역사의 과도기 속에 빌제의 재정은 늘 바닥을 보였고 ‘빌제 카펠레’ 단원들 또한 곤궁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1882년 바르샤바로 연주여행 도중 4등석 기차 안에서 결국 54명의 단원들은 파업을 일으켜 빌제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여전히 재정적으로 어려움에서 해결될 길이 없었던 이들은 공연기획자인 헤르만 볼프에게 의탁했고, 볼프는 악단 이름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개칭하고 롤러 스케이트장을 개장한 콘서트홀에서 상주연주를 시도했다.

볼프의 가장 큰 공로는 역시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 명성이 높았던 한스 폰 뷜로를 영입한 것이다(뷜로는 지난 번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 칼럼에 등장한 바 있다). 뷜로는 자신의 명성을 최대한 이용해 당대 최고의 연주가들과의 협연을 주선하고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이코프스키 등의 작품을 초연하며 베를린 필을 유럽 최고의 악단으로 급부상시켰다. 결국 빈 필처럼 “오케스트라의 주인은 단원이며 민주주의적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을 표방했던 베를린 필은 1887년 이러한 뷜로의 업적을 높이 사 그를 초대 상임 지휘자로 임명했다.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고 자발적인 색깔이 강한 빈 필과 대조할 때 베를린 필의 역사는 ‘카리스마’의 역사라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1895년 한스 폰 뷜로에게 바톤을 물려받은 아르투르 니키슈, 1923년 입성한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그리고 1955년부터 죽을 때까지 종신지휘자로 군림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세계 최정상의 지휘자로서 베를린 필의 이름을 대표했다. 이들은 또한 독재자로도 명성이 높아 베를린 필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 이념을 무색케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휘자들의 독재주의는 카라얀의 서거 이후 반전됐다. 1989년 쟁쟁한 지휘자들이 후보자로 거론되는 가운데 상임지휘자 임명권을 가지고 있는 베를린 필 단원들은 뜻밖에도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선택했다. 아직 이렇다 할 오케스트라의 상임으로 임명되지 못하고 객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아바도는 당시 주목받는 ‘신인’에 불과했다. 지휘자의 명성에 의존했던 베를린 필은 거꾸로 아바도에게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로서의 명성을 부여했고, 아바도는 이에 부응하며 독단적인 정책을 배제하고 민주적으로 악단을 이끌어 나갔다. 그런 아바도가 1998년 사임의 뜻을 내비췄을 때, 단원들은 역사상 유래없는 지휘자를 위한 송별 콘서트를 마련해 한없는 애정과 우정을 표시했다.

1999년 아바도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 단원은 로린 마젤이라든가 다니엘 바렌보임과 같은 명망높은 지휘자의 이름을 뒤로 한 채 영국의 일개 지방에서 활동하던 사이먼 래틀을 선택했다. 기존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보하고자 하는 이 세계 최고의 악단의 노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래틀의 젊은 잠재력과 대단히 궁합이 잘 맞아 보인다.

노승림/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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