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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3 18:00 수정 : 2005.11.24 16:36

날것 그대로 내보이는 삶의 편린들

윤영선이 쓰고 이성열이 연출한 <여행>이 공연된다고 했을 때 나는 이것이 대단히 추상적이고 몽환적인 연극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버렸다. <사팔뜨기 선문답> 이후로 극작가 윤영선이 언제나 삶에서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끌어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을까? 인생에 ‘소풍’나왔다는 시인 천상병처럼 그가 우리 인생을 묘한 여행으로 각색해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무대에서 만난 <여행>은 너무나 날 것 같은 현실적 인물들이 현실적 상황에 놓인, 그야말로 리얼리즘의 연극이었다. 무대 한 옆에 앉은 기타리스트 김동욱의 잠깐씩의 연주만이 극을 약간씩 변주시킬 뿐 밋밋한 무대 위에서는 배우들의 대화와 말대꾸, 싸움과 넋두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친구의 갑작스런 부음에 다섯 명의 친구가 모였다. 회사 사장인 만식과 대철, 신발가게를 하는 상수, 택시기사 양훈, 영화감독 태우. 40대 말 혹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들은 서울역을 떠나 빈소가 있는 창원으로 향한다. 죽은 친구 외에 이들의 대화 속에는 여섯 번째 친구가 도사리고 있는데, 그는 친구에게 빚을 지고는 죽음을 가장한 실종 속에 몸을 숨긴 기택이다.

기차에서부터 분위기를 눅이기 위한 음담패설과 욕설이 오가고 썰렁한 초상집에선 독설과 다툼이 오가면서 이들의 장례 여행은 홍상수 식의 냉정한 인간 관찰을 유도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윤영선의 등장인물들은 치부를 드러내야 할 만큼 속되지 않고 그만큼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속없이 자기 생각을 모두 말하고 그래서 무시당하는 양훈을 제외하고는 이들의 삶은 어느 정도 모호함 속에 남아 있다.

술을 마시고 고스톱을 치며 설전을 벌이는 이들의 모습은 여느 초상집에서 보이는 풍경 그대로다. 기택이 초상집에 모습을 보이면서 친구들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어 싸움판이 되어가는 것도. 돈과 우정을 둘러싸고 이들의 관계는 이들의 나이만큼이나 얽혀있는 것이다. ‘죽음에 의한, 죽음을 위한’ 이 여행을 통해 우리는, 극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현재도 위태로움을 숨길 수 없는 이 여섯 친구의 인생이 지닌 곤고한 단면들을 엿본다.

서울역에서부터 기차로, 상갓집으로, 화장터로, 돌아오는 관광버스로, 비 오는 서울의 버스터미널로. 연극의 집단 주인공 격인 이 인물들을 자리를 옮기며 과장 없이 묘사한 희곡의 태도는 연출 개념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최소한의 기호로 주위 환경을 지시하는 무대는 그 소박함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초상집 풍경에서는 빈약함을 드러내고 만다.

오랜 친구들과 만나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친구의 죽음과 만나면 그 상실감 속에 전해지는 삶의 무게와 불안은 걷잡을 수 없으리라. 관광버스 안에서 광란을 벌이는 남자들, 서울에 와서도 무너져 내리는 듯한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양훈의 증세는 모두 같다. 작가 역시 이를 지적(知的)으로 해독하려 하기보다는 함께 앓는 편을 선택한 것 같다. 11월27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노이정/연극평론가 voiv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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