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07 17:33
수정 : 2005.12.08 16:49
노승림의무대X파일 -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영화 <백야>의 히어로로 한국의 팬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그가 영화 <백야>의 주인공과 실제로 처지가 비슷했던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열한살의 나이에 겪은 어머니의 자살,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소원했던 관계는 녹록치 않았던 그의 어린 시절을 대변한다. 라트비아 변방의 발레학교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바가노바 발레학교에 입학한 그는 1966년 불가리아 바르나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며 처음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4년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의 솔리스트로서 캐나다 토론토에 원정공연을 간 틈을 타서 서방으로 망명한 바리시니코프는, 그러나 그보다 일찍 망명했던 누레예프나 마카로바와는 망명사유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들 발레계의 대선배들이 정치적 자유와 자본주의를 추구했다면 바리시니코프가 더욱 바랐던 것은 표현의 자유, 그중에서도 모던 댄스였다. 그러나 그의 터전이었던 키로프발레단은 고전발레의 아성으로 대단히 보수적이고 또 권위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안무가 여성 위주로 짜여졌다.
망명한 뒤 미국으로 건너온 바리시니코프는 뉴욕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 정착했다. 그의 타고난 발레 재능과 훌륭한 카리스마, 그리고 반항아적 기질은 금세 뉴욕 발레계의 명물이 되었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는 바리시니코프의 이름과 더불어 뉴욕시티발레단과 어깨를 대등하게 겨루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스타 기질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던지라 그의 무대는 단지 발레를 위한 스테이지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결국 스크린에까지 확대되었다. <터닝포인트(사랑과 갈채의 나날)> <백야> <지젤> 등 그가 주역으로 등장했던 일련의 영화들은 젊은 시절 바리시니코프가 가지고 있던 발레리노로서의 화려한 개인기와 더불어 냉소적이고 반항적이며 또한 바람둥이 기질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발레댄서로서 은퇴할 나이에 그는 오히려 현대무용단인 ‘화이트 오크 프로젝트’를 창단하여 주역 댄서로 활동, 모던댄스의 부흥에 앞장섰다. 이 단체는 지난 2000년 서울에서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다. 서방에서 성공한 다른 러시아 출신 댄서들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따뜻한 환영을 받았던 것과 달리, 바리시니코프의 경우 뉴욕에서 유명세를 날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신지인 상트 페테르부르크(키로프)에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모던 댄스 활동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모던 댄서로서도 공식적으로 은퇴했지만 아직도 그의 이름은 여전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뉴욕을 장악하고 있다. 그가 설립한 무용교육학교 ‘바리시니코프 아트센터’는 해마다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그의 이름을 딴 ‘미샤’(미하일의 애칭)라는 향수를 출시했는가 하면, 그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판매할 정도로 사업 수완도 뛰어난 편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트콤 <섹스 & 더 시티>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지갑을 훔친 소매치기를 좇아서 장애물 달리기를 마다 앉는 노장 발레리노의 여전한 바람기와 노익장을 엿볼 수 있었다.
노승림/공연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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