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04 16:54
수정 : 2006.01.05 14:44
노승림의무대X파일 -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남긴 일화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로서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왕립 발레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친구가 황제의 무릎에 앉은 것을 보고 겁도 없이 대놓고 질투를 하며 투정을 부렸다는 일화는 그녀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예술가로서의 고고함을 애초에 갖추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과연 예상대로 그녀는 뛰어난 실력과 예술성, 그리고 자존심을 겸비한 프리마 발레리나로 성장하였고 유럽의 귀족들은 그녀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여왕으로 칭송하며 떠받들었다. 조명 한줄기가 잘못 비춰지거나, 의상에 단추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박혀 있으면 욕설과 함께 주저 없이 발레슈즈를 매니저에게 집어던지는 거침없는 성격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그녀의 도도한 이미지를 오히려 한층 격상시켜주는 요소가 되어 주었다. 이 모든 안락과 명예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마린스키 극장 분위기가 지루하고 답답하다는 이유로 주저없이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1913년 미국행을 계기로 안나 파블로바의 이미지는 180도로 돌변한다. 그곳에는 황금빛 왕립극장 대신 낡고 누추한 시골무대들이 살인적인 스케줄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안나 파블로바는 이런 무대들을 진정 기쁜 마음으로 누리고 다녔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임에도 그녀는 9개월간 미국의 77개 고장에서 무려 238회의 공연을 소화해냈으며 그 가운데에는 쥐가 득시글거리는 지하실이라든가 더러운 차고를 개조한 시골의 작은 극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까다롭기 그지없던 러시아의 프린세스가 미국의 낡은 무대를 전전하는 동안, 귀족취향의 사치스런 예술로 각인되어 있던 고전 발레는 낮은 곳으로 임하여 일반 대중들이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공연으로 이미지가 변모하였다.
살아 생전 수없이 많은 레퍼토리를 상연하였지만 안나 파블로바를 대표하는 작품은 역시 <빈사의 백조>다. 1907년 그녀의 파트너인 미하일 포킨이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가운데 <백조>를 가지고 안무한 이 작품은 사냥꾼에게 총을 맞고 숨져가는 백조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불과 2분간의 춤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대신할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을 만큼 <백조>에 각인된 파블로바의 명성은 확고부동했다. 초연되자마자 전 세계 각국에서 그녀의 <백조>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고위급 인사들과 예술가들은 누추한 극장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나란히 객석에 앉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완벽주의자였던 파블로바는 무대 위에서만큼은 여전히 러시아 시절의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때로는 커튼이 드리워진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때로는 군무들의 연습이 불충분하다고 스태프들을 닦달하고 피를 말렸다. 그 가운데에는 미소를 띠게 만드는 일화도 있다. <빈사의 백조>를 리허설 하면서, 안나 파블로바는 박자를 놓치는 실수를 하고는 무안한 나머지 애꿎은 첼리스트를 나무랐다. “이봐요. 이 부분에는 분명 쉼표가 있어 한 박자 쉬어야 한단 말이에요. 왜 그냥 이어서 연주하는 거죠?”
후덕한 표정을 가진 첼리스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여유 있게 대꾸했다. “이 부분에 쉼표는 없습니다, 마돈나.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지금 바로 넣어드리죠.” 바로 그 연주가는 이 음악을 작곡한 장본인인 카미유 생상스였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팀장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