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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북쪽 천마산 자락 오조천 상류에 걸린 박연폭포. 범사정 밑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폭포 밑의 소가 고모담, 왼쪽에 보이는 바위가 용바위다. 박연은 폭포 위에 있는 바가지를 닮은 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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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뿌리친 화담도 너한테 반할수 밖에…
개성 관광의 매력은, 북녘 주민의 생생한 표정과 맞닥뜨린다는 데 있다. 북녘 도시의 거리를 둘러보며, 남·북 주민이 서로 손 흔들고 웃고 고개 숙여 인사한다는 것. 중국을 거치는 백두산 관광이나, 육로를 통한 최근의 금강산 관광에서도 생각할 수 없던 일이다. 지난 26일 개성 시범관광을 시작으로, 남북의 일반 주민이 서로 눈 맞추며 55년간 굳어온 표정을 풀 수 있는 실질적인 자리가 마련된 셈이다. 이런 매력의 전후 좌우로, 한때 우리 역사의 중심지였던 고색창연한 도시 유적과 선인들의 체취가 밴 아름다운 경치들이 펼쳐진다. 예성강은 개성땅 서쪽에 있다. 하류엔 고려시대 무역항 벽란도가 있었다. 고려가 송·일본·아라비아 등과 문물을 교역하던 국제 무역항이다. 벽란도에서 길을 따라 이어진 가게들의 처마 밑을 걸으면, 비를 맞지 않고 개경까지 갈 정도로 무역이 번성했다고 한다. 이 예성강의 한 지류가 개성의 북쪽 천마산 기슭에서 발원한다. 산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오조천이다. 박연폭포는 바로 오조천 최상류 바위자락에 걸려 있다. 개성 중심지에서 직선 거리로 14㎞, 길을 따라선 25㎞ 지점이다. 시범관광을 함께 한 개성 출신 남쪽 실향민들은 “개성에서 40리 산길을 몇 시간씩 걸어서 폭포 구경을 왔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차로 30분,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타고 9㎞쯤 가다 빠져나와 포장길을 15㎞ 달리면 닿는다. 박연폭포 가는 길은 부드러운 초록빛에 둘러싸인, 나무가 드문 구릉지들과 그림처럼 펼쳐진 논, 옥수수밭·콩밭·인삼밭이 반겨준다. 주민들은 옥수수를 수확하다가, 소를 며 쟁기질을 하다가 남녘의 관광 버스를 향해 먼저 손을 흔들기도 한다. 나무 없는 야산이 안타까워보일 무렵 숲이 울창해지면서 깨끗한 물줄기 오조천을 만난다. 그리운 얼굴들에 눈 맞추고
거센 부채살 물살 장관이라
용바위 글씨는 뉘 작품인가
관음사 보살님이 아실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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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 앞 용바위에 새겨진 한시들. 오른쪽 초서가, 이백의 시구를 황진이가 머리채로 썼다는 ‘비류직하삼천척…’, 왼쪽은 ‘이산()’이란 이가 쓴 ‘백시황필양웅재…’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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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 위쪽에 있는 대흥산성의 북문. 잘 보전된 고려시대 성문이다. 범사정을 지나 숲길을 오르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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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신상 앞세운 왕건릉·포은 쓰러진 선죽교 ‘오롯이’ 우리의 첫 통일국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엔 수많은 역사 유적지가 흩어져 있다. 시범관광 일정에 든 개성의 주요 문화유적지들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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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박물관=고려성균관 안에 있다. 고려성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으로, 고려 992년에 세워진 국자감의 후신이다. 고려 문종때 대명궁이라는 별궁이 있던 자리에, 1089년 국자감이 옮겨왔고 1308년 성균관으로 개칭했다. 1988년부터 고려시대 유물들을 한데 모은 고려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마당에 500살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널찍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내부 건물을 4개의 전시관으로 꾸며 1000여점의 유물을 전시중이다. 고려청자들과 11세기의 금속활자, 사신도·선녀상 등이 섬세하게 조각된 돌관, 적조사 쇠부처, 청동종·징·화로 등이 실내에, 불일사오층석탑·흥국사탑·헌화사칠층탑, 각종 부도·석등 등 고려때 돌조각품들이 야외에 전시돼 있다. 왕건왕릉·공민왕릉=왕건릉엔 고려 태조 왕건과 왕비 신혜왕후의 무덤이 있다. 3단 축조된 무덤 둘레의 문무인상, 12지신상 등 석조물이 볼만하다. 최근엔 능에서 청동 왕건조각상이 출토됐다. 공민왕릉엔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의 무덤이 있다. 3단 축조된 무덤엔 단마다 호랑이 등의 동물상, 문인상과 석등, 무인상 등이 도열해 있다. 우리나라 능표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내부엔 무덤 모형과 벽화가 전시돼 있다. 숭양서원=정몽주가 살던 집터에 세운 사립 교육기관이다. 학생들의 숙소이던 동·서재, 강당, 정몽주 초상을 모신 사당 문충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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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숭양서원 부근에 있는 길이 6.7m, 폭 2.5m의 작은 돌다리. 정몽주가 이방원의 군사에 의해 살해된 곳이다. 죽은 자리에서 대나무가 돋아났다 해서 선죽교다. 1780년 개성 유수로 부임한 후손 정호인이 다리에 난간을 설치해 통행을 막고, 옆에 새 돌다리를 놓았다. 다리 옆에 한석봉이 쓴 선죽교비, 하마비, 충절을 기리는 성인비 비각 등이 있고, 다리앞 길 건너 건물엔 조선 영조와 고종 때 세운 두 개의 표충비가 있다. 남대문=직접 살펴볼 수는 없지만, 개성 시내에 있어 관광지 오가는 길에 차 안에서 볼 수 있다. 본디 고려말 내성(반월성)의 남문이다. 육이오때 미군 폭격으로 불탄 것을 5년 뒤 복원했다.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다. 누각엔 연복사에서 옮겨온 종(1346년 주조)이 걸려 있다. 소리가 백리를 간다는, 국내 5대 명종의 하나다.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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