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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인정하듯, 미국의 학계에 성 차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차별에 절망하고 미국에 간다면, 도대체 우리 학계의 차별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여성과학기술자의 확충을 위한 컨퍼런스를 열어본 적은 있는가? 한국 학계의 주요한 인물이 회의석상에서 서머스가 한 실수를 한다면 우리한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화제가 되기는 할까?” 하버드 총장이자 전 미국 연방정부 재무부장관이고, 현대경제학계의 최고 천재 중의 한 명인 로렌스 서머스가 최근 전미경제연구국(NBER)의 ‘과학기술인력의 다변화: 여성, 소수자 과학기술 커리어’라는 제목의 컨퍼런스에서 행한 발언이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머스는 전문 과학기술인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은 이유에 대한 3가지 가능한 설명을 제시했는데, 육아를 희생하면서 주당 80시간의 연구를 수행하려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적다는 것, 남성과 여성 사이의 과학기술 능력의 유전적 차이 존재, 그리고 대학의 차별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있던 MIT 생물학자 낸시 홉킨스는 서머스의 발언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그 자리에 남아서 그런 주장을 더 듣다가는 숨이 막히고 쓰러졌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많은 여성학자들이 홉킨스처럼 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서머스를 비판했고, 하버드의 동창회와 각종 위원회는 서머스에 항의했다. 일부는 서머스의 파면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서머스는 사과했다. 사실 컨퍼런스에서 서머스가 행한 주장만을 놓고 보면, 서머스로서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과학기술 능력의 유전적 차이가 있다고 단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유전적 격차가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홉킨스는 서머스가 3가지 요인을 중요성의 순서로 제시한 것이며, 차별을 가장 덜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유전적인 신체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 능력과 심리에 있어서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호르몬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 역시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서머스는 존재하는 사실을 앞에 두고 ‘과학자’로서 다른 과학자들의 가설을 소개하고 연구를 독려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명의 연구자의 발언이 아닌,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인 ‘하버드의 수장’으로서 서머스의 발언은 경솔한 것이었다. 나는 그가 경제학에서 보여준 놀라운 성과를 고려해 볼 때, 서머스가 교묘하게 또는 반대로 무의식 중에 자신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미국의 많은 기사에서 서머스를 희생양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학계가 자유로운 연구를 관용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든가, 심지어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의 인민재판” 이라는 악담까지 등장했다. 서머스는 ‘나는 단지 연구를 독려한 것뿐’이라는 입장이지만, 유전학과 인지론의 몇 가지 발견들이 마치 남성과 여성 사이에 극복 불가능한 내생적 격차를 인정한 것이 학계의 보편적 의견이라거나, 나아가 제도적, 문화적 차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도의적 정당성(political correctness)을 앞세워 자유로운 연구에 장애가 될 뿐이라든가 하는 식의 주장이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서머스가 억울해하든 아니든 그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친구 중에 여성화학자가 한 명 있다. MIT 박사, 미국 주요 연구소 재직 등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던 그는, 한국에 돌아와 짧은 교수 생활을 마치고, 학계의 차별과 남성적 문화에 찌든 관료주의 등에 절망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직장을 구해 연구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모두가 인정하듯, 미국의 학계에 성 차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차별에 절망하고 미국에 간다면, 도대체 우리 학계의 차별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여성 과학기술자의 확충을 위한 컨퍼런스를 열어본 적은 있는가? 한국 학계의 주요한 인물이 회의석상에서 서머스가 한 실수를 한다면 우리한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화제가 되기는 할까? 유전적 차이가 있는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한국 여성 과학자의 94.7%가 취업시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자. 일단 제도적 차별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지난 세기 초 괴팅엔 대학의 힐버트가 여성 수학자 에미 뇌터를 교수로 임용하려고 할 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반대한 이들에게 던진 말이 아직도 유효해서야 되겠는가. “신사 여러분, 여기는 대학입니다. 목욕탕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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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우 경영컨설턴트 rcolboy@hotmail.com
1967년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기업 재무관리 시스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홍대 앞 카페에서 커피와 보드카를 마시며 수다 떨기를 유난히 즐긴다.
[‘푸뚜앙떼리요르’란 ‘전미래’란 뜻으로, 미래 어느 시점의 특정한 변화나 행동을 위해서는 그에 선행하는 또 다른 미래의 변화나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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