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7 16:57
수정 : 2005.02.27 16:57
‘매일 전쟁 중….’
전자업계 홍보팀의 한 직원은 며칠 전부터 메신저 머릿말을 이렇게 올려놓고 있다. 한국 전자·정보통신 산업의 두 기둥인 삼성전자와 엘지전자가 연초부터 벌이고 있는 홍보·영업전이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밖에서는 물론, 안에서도 ‘도를 넘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4일 수원의 정보통신연구소를 내외신 기자들에게 전격적으로 개방했다. 지난 2001년 12월 문을 연 이 연구소는 500만 화소 카메라폰과 위성·지상파디엠비(DMB)폰, 휴대인터넷(와이브로) 등 최첨단 휴대전화 개발의 심장으로, 그간 ‘공개 불가’ 대상이었다. 삼성전자가 이곳을 전격 공개한 날은 엘지전자가 서울 가산동에 통합 단말연구소를 만든 날과 겹쳤다. 이날 엘지전자는 구본무 그룹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연구소 개소식을 대대적으로 연 것이다. 엘지전자 관계자는 “오너인 회장이 참석하는 행사가 열리는 날에는 맞불 발표나 행사는 하지 않는다는 업계의 신사협정이 깨졌다”며 “이렇게 되면 앞으로의 분위기는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흥분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미리 예정된 행사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 올 들어 9번 충돌=삼성전자와 엘지전자의 충돌은 올해 초부터 시작됐다. 시발점은 1월 초 삼성전자의 세탁기 보상판매와 에어컨 예약판매 행사였다. 세탁기와 에어컨은 엘지전자가 우위를 지키고 있는 시장인데, 삼성전자는 올해 이 시장 판도를 뒤바꾼다는 전략 아래 올해 초부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1월12일에는 삼성전자가 3차원으로 동작을 인식하는 ‘동작인식폰’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하자, 엘지전자가 이미 지난해 개발이 끝난 제품이라고 반격했다. 다음날인 13일에는 엘지전자가 100만 ‘폴리곤’(3차원 그래픽 구성단위) 게임폰을 내놨다고 발표하자, 삼성전자가 곧바로 130만 폴리곤 게임폰을 개발했다고 응수했다.
또 닷새 뒤인 18일에는 삼성전자가 인텔의 차세대 노트북 프로세서인 ‘소노마’를 탑재한 노트북을 세계 최초로 판매한다고 발표했다. 소노마 노트북 판매를 준비하던 엘지전자도 곧바로 판매 발표를 하려다, 인텔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월31일에는 엘지전자가 32인치 슬림형 브라운관 디지털 텔레비전을 판매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해 업계를 뒤집어 놓았다. 삼성전자도 부랴부랴 제품을 판매한다고 보도자료를 뿌렸지만, 두 회사 모두 제대로 된 양산체제도 갖추지 않은 상태여서 소비자들의 불만만 샀다.
2월 들어서는 지난 22일 삼성전자가 스팀 건조로 빨래 구김방지 기능을 넣은 세탁기를 개발했다고 발표하자 엘지전자도 3시간 뒤 ‘우리도 개발했다’고 맞불을 놨다. 그리고 결국 두 회사는 24일 정보통신연구소 공개 행사 일정 문제로 정면 충돌한 것이다.
■ 경쟁은 발전의 힘, 문제는 감정=두 회사의 전면전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삼성전자는 엘지의 근거지인 가전 부문을 계속 파고들어 왔고, 엘지전자도 휴대전화와 디스플레이에서 쌓아온 삼성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가전 분야에서는 세탁기와 에어컨만 정복하면 된다는 판단 아래 지난해부터 계속 고급화와 신제품 개발에 전력을 쏟아 왔고, 엘지전자는 휴대전화 사업 분야에 주력해 지난 4분기에는 지멘스를 제치고 휴대전화 분야 세계 4위에 올라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여기에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사이 삼성전자와 엘지전자의 홍보 분야 최고 사령탑이 바뀌면서 홍보전이 좀더 공격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의 소니와 마쓰시타가 70~80년대 일본 내수시장에서 한치의 양보 없는 경쟁을 벌인 결과 일본 가전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것은 업계의 상식”이라며 “삼성과 엘지의 경쟁은 계속돼야겠지만, 소모적인 세계 최초 논쟁은 불필요한 감정의 충돌”이라고 꼬집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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