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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16일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연설하고 있는 앨런 그린스펀 미 연준 의장. 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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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그린스펀은 화려한 수사법으로 숱하게 시장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난 1996년의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 파문이다. 과열 양상으로 치닫던 주식시장의 행태를 경계하며 그가 던진 발언의 여파로 인해 세계 증시는 일제히 폭락한 바 있다. 연준의 공세적인 대응을 경계한 때문이다. 지난 2월의 “수수께끼”(conundrum) 발언도 마찬가지다. 시장에서는 역시 공세적인 금리 인상의 신호탄으로 간주했다. “단기 금리는 아직도 낮고”, “지금의 채권 가격은 단기적인 일탈”이라는 그의 지적에 주목한 탓이다.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서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다. 특히 시장은 이번에 인플레이션 평가가 달라진 점에 주목하며, 연준마저 이제 ‘인플레 안테나’를 올리고 있다고 해석했다. 물론 그간 점진적인 금리 인상의 보증으로 간주돼 온 ‘measured’라는 단어는 이번 성명서에서도 유지됐지만, 이 표현을 삭제할 경우 발생할 시장 충격을 의식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연준의 이 같은 태도 변화를 오로지 인플레이션 위협에 대한 경계만으로 환원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지난해까지 미국 경제를 압박해 온 디플레이션 리스크가 해소됐다는 자평에 다름 아니라는 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정작 문제는 이른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전략이라는 미명 아래 그간 연준이나 그린스펀 스스로가 조장해 온 시장과의 불장난이다. 이를 집약하는 단어가 바로 ‘measured’다. 이 말 한마디에 시장은 연준이 시장 충격 없이 당분간 매번 0.25%포인트씩의 점진적인 금리 인상에 머물 것이며, 따라서 시장 충격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언제부터인가 연준의 운신 폭은 되레 제약받아 온 게 사실이다. 시장의 지나친 신뢰로 인해, 그와 충돌했을 때의 파장이 그만큼 커진 때문이다. 따라서 연준 내부적으로 과도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에 따른 시장 기대의 고착화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차츰 확산돼 왔다. 이에 그린스펀이 칼을 뽑아들었다. “글로벌 채권시장의 이상 행태”와 관련해, 아시아의 ‘달러화 리사이클링’(dollar recycling) 등 제반 설명 요인들을 일축하고, “수수께끼”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세계 경제의 마에스트로’로 추앙받는 그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수수께끼’는 결국 ‘불확실성’ 변수를 환기시킨다. 금융시장에서는 이런 불확실성을 (계량 가능한)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소화한다. 사실 그린스펀은 “수익률 곡선의 단순 수학”을 동원해 해법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장기 금리를 현재의 단기 금리와 미래 기대 단기 금리의 가중 평균으로 설명하는 식 외에 뭔가 다른 변수가 필요하다. 금융 이론에 따르면, 채권수익률은 기대수익률에다 ‘리스크 프리미엄’(risk premium)을 얹은 것이다. 리스크 프리미엄에는 최근 GM 충격에서 드러난 ‘디폴트 프리미엄’, 혹은 인플레이션 압력과 결부된 ‘인플레이션 프리미엄’ 외에도, 미래의 불확실성과 결부된 ‘유동성 프리미엄’이 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리스크 프리미엄이다. 결국 그린스펀이 ‘수수께끼’라는 표현을 통해 의도했던 것은 정작 자신이 부여했던 ‘확실성’의 자리에 불확실성을 대체시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간 장기 금리의 저공비행, 나아가 리스크 스프레드의 이례적인 축소는 바로 이런 확실성에 기반해 왔다. 이로 인해 시장 리스크 인식이 실종 혹은 억압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리스크 프리미엄이 부활하면서 그 기조가 서서히 반전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사소한 충격에도 시장 민감성이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린스펀의 불확실한 승산 이런 불확실성에 대한 환기를 통해 그린스펀은 일단 정책 유연성 혹은 재량의 여지를 도모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는 공세적인 긴축으로의 선회가 아니다. 시장 기대에 구속되지 않는 다양한 선택의 여지를 남겨 둔 것일 뿐이다. 나아가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즉 ‘장기금리 정상화’도 주요한 목표다. 정리하자면, 리스크 프리미엄을 부활시켜 시장을 정상화시키겠다는 얘기다 그간 시장의 관심은 줄곧 50여년 이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던 ‘기준금리의 정상화’에 집중돼 왔다. 이른바 ‘중립 금리’를 둘러싼 논쟁이 그 예이다. 물론 여기서도 확실성 인식의 도움으로 시장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린스펀이 시장 혹은 장기 금리를 직접적인 공략 대상으로 삼으면서 사정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특히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1990년대 버블의 교훈이다. ‘비이성적 과열’에 대한 사전 진화에 나섰던 그는 아시아 금융위기나 LTCM 붕괴를 맞아 발을 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상 초유의 버블을 방치하고 만 경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린스펀은 다시 새로운 버블 리스크를 경계하며, 시장의 “무절제”와 “자기만족”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특히 내년 초 퇴임을 앞둔 그로서는 미국 사상 가장 뛰어난 연준 의장으로 평가받는 자신의 업적을 자칫 무위로 돌릴지도 모를 이런 위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맹점은 남는다. 연준의 막강한 파워나 위상에도 불구하고, 정작 장기금리 혹은 시장금리라는 게 연준의 통제력을 벗어난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건 시장과의 ‘불장난’이 재점화된 것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시장의 과도한 신뢰는 문제가 된다. 사실 최근 국제 금융시장의 교란을 주도하고 있는 장본인은 투기세력들이다. 흔히들 주목하는 ‘달러화 캐리 트레이드’(dollar carry-trade)의 청산은 투기적 압력의 해소, 혹은 시장 정상화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연준이라는 구원투수에 기댄 ‘자산의 로테이션’일 뿐이다. 그리고 불확실성은 투기의 주무대다. 시장을 겨냥한 그린스펀의 모험 역시 결국 이런 불확실성에 내맡겨진 꼴이다. ‘포스트 그린스펀’ 시대를 앞두고 정책 실패 가능성이 다시 부상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배경에서다. 아마도 그 불똥은 한국을 비롯해 국제 금융시장 전반에 막대한 파장을 초래할지 모른다. 장보형 와이즈인포넷 수석연구원 jangbo@wiseinfonet.com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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