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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29일 열린 국회 금융정책연구회 창립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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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앞장서 5%룰 등 규제 법안 마련…득실 여부 등 합의점 도출 쉽지 않아
국회가 ‘투기성’ 외국 자본에 대해 본격적으로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최근 불거진 ‘5%룰’ 논란의 진원지도, 따지고 보면 여의도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여야 의원들이 외국 자본을 규제하기 위한 법안들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5%룰은 그 첫 성과물이다. 그동안 전문성의 벽으로 인해 ‘블랙홀’로 여겨지던 금융분야를 파고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의원들도 늘고 있다. 이미 2개의 금융연구모임이 국회에 만들어졌고, 한 곳이 4월 중 출범한다. 외환위기 이후 꾸준히 제기돼 온 투기자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일부에서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편승해 오히려 역효과만 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서울발 보도가 큰 파장을 불렀다. 4월1일부터 강화된 ‘5% 룰’을 겨냥해, 한국 정부가 한쪽으로는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다른 발로는 브레이크를 밟는 ‘정신분열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다. 개정된 5%룰은 해당 기업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하는 투자자에게, 투자 목적이 단순 투자인지 경영권 참여인지를 밝히게 하고, 후자에 해당할 경우 자금출처와 주주구성을 공개하도록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번 개정안이 글로벌스탠더드나 금융 허브를 부르짖는 한국 정부의 정책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배후에는 소버린 사태 등으로 강화된, 한국의 외국 자본에 대한 ‘공포감’이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자극적인 보도에 불끈한 것은 정책 담당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국내 언론이 나서 <파이낸셜타임스>의 주장은 딴죽 걸기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미국이나 영국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5%룰이 똑같이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이댔다. 몇몇 언론은 유럽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파이낸셜타임스>의 불순한 의도를 문제 삼기도 했다. 이번 논란을 지켜본 한 경제전문가는 “5%룰 문제가 경제분야의 독도 문제가 돼버린 느낌”이라고 평했다.
<파이낸셜타임즈>, “5%룰은 정신분열적 정책”
어쨌든 <파이낸셜타임스>의 ‘글로벌스탠더드’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옳게 본 내용도 있다. 외국 자본을 대하는 한국 내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 말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쪽으로 치우쳤던 것이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외국 자본에 대해 적어도 국내 자본과 동일한 수준의 행동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국회다. 5%룰을 둘러싼 이번 ‘소동’의 첫 출발도 지난해 10월 여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2004년 10월2일, 김애실 한나라당 의원이 증권거래법 개정안을 처음 국회에 제출했다. 투기자본의 적대적 M&A를 규제하기 위해 5%룰을 대폭 강화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하현철 김애실의원 정책보좌관은 “기존에 없던 규정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다”라며 “이미 법에 들어 있지만, 안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던 5%룰을 투자자 보호라는 원래 취지대로 운영하자는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내외국인에 차별 없이 적용되는 규정인 만큼 특별히 외국인 투자가들이 반발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곧이어 송영길 열린우리당 의원이 김애실 의원의 안보다 한층 강화된 개정안을 제출했다. 송영길 의원은 발행회사의 요청이 있을 경우 금융감독위원회에서 보고내용을 조사할 수 있도록 하고, 의결권 행사를 묶는 3개월간의 냉각기간을 추가 도입했다. 두 법안은 모두 현행 제도가 적대적 M&A를 추진하는 ‘공격자’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을 깔고 있다. 이를테면, ‘SK-소버린 분쟁’에서 SK가 소버린의 의도를 미리 알아채고 대비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후 두 법안은 새로운 법안으로 통합돼 12월31일 국회를 통과했고, 이번에 적용되게 된 것이다.
애초의 두 법안에 비한다면 최종안은 한층 완화된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법안 논의과정에서 냉각기간이 3개월에서 10일로, 다시 5일로 축소됐다. 재정경제부에서 나서 ‘글로벌스탠더드’에서 벗어날 경우 외국인 투자가들이 대거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측이 외국인 투자가들의 반응에 대해 법 실행 전에 충분히 검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파이낸셜타임스>의 ‘글로벌스탠더드’ 주장에 대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으로도 외국 자본 규제를 둘러싼 논란이 쉽게 수그러들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외국 자본 규제 법안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논란의 불씨는 신학용 열린우리당 의원이 제출한 은행법 개정안으로 옮겨 붙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과정을 집중 추궁해 주목을 받았던 신학용 의원이 제안한 개정안의 핵심은 크게 2가지다. 우선 단기 자본의 은행 인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것. 현행 은행법은 은행의 대주주 자격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부실금융기관의 정리 등’의 경우는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은행업을 영위하지 않는 사모펀드에 불과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예외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용 의원은 예외를 ‘부실금융기관의 정리’로 명확하게 한정하고, 예외적으로 은행을 인수한 경우에도 2년 이내에 ‘적격심사’를 받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이렇게 되면 사모펀드에 의한 은행 인수는 이제 불가능해진다. 적격심사를 통과하려면 자금 출처, 주주 구성 등을 낱낱이 공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은행 이사의 2분의 1 이상을 내국인으로 하도록 하고, 1년 이상 국내에 거주한 경우에만 이사 자격을 준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예상과는 달리, 이사의 국적 제한 부분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관련 조항에 대해 EU가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를 검토하고 있다고 발 빠르게 보도했다. WTO 양허안에 들어 있지 않던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는 것이어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덕수 경제부총리 등 정부 관계자들도 국적 제한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용 의원은 4월 임시국회에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사전 심사를 통해 국가안보 등에 위협이 될 외국인 투자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 2건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외국 자본에 대한 각종 조세특혜의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외국인 투자자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 법인세와 소득세 감면, 기술개발 정책자금 우선 지원, 인건비 지원, 인프라 지원 등은 이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국내 기업에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외국 자본 ‘바로 보기’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국회 내 연구모임 속속 결성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회 내 연구모임도 속속 결성되고 있다. 금융분야에 대한 전문성 부족을 ‘공동 학습’을 통해 채워나가겠다는 것이다. 지난 3월29일 신학용 의원이 가장 먼저 국회금융정책연구회를 출범시켰다. 홍성화 신학용의원 정책보좌관은 “지난해 국점감사를 평가하면서 금융연구모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외국 단기 자본의 폐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금융”이라고 말했다. 국회금융정책연구회는 우리금융의 민영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개최한 데 이어, 조만간 기업의 경영권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금융 세계화와 한국 경제’ 의원 연구모임은 심상정 민주노동당의 의원, 이혜훈 한나라당 의원, 우제창 열린우리당의 의원, 김종인 민주당의 의원 등 4인이 주축이 돼 결성됐다. 여야 4당 의원이 고르게 참여하고 있고, 시장 중심주의자, 개혁론자까지 다양한 성향의 의원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건호 심상정의원 정책보좌관은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서로 솔직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열린 모임을 지향한다”며 “국회에 금융 관련 연구모임이 하나 더 생길수록 그만큼 우리 금융도 건강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금융 서비스 시장 개혁 연구모임’이 오는 4월22일 출범을 앞두고 있다. 이 모임은 통합금융법 등 금융 선진화에 초점을 맞추되, 외국 자본 규제 등 다양한 금융 관련 이슈를 함께 다뤄나갈 계획이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외국 자본 규제를 둘러싼 논의에서 국회가 가장 앞서가고, 정부는 이를 뒤처져 따라가는 형태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 국회 관계자는 “외국 자본에 대한 최근 논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국제적인 관계를 고려하면 이런 문제에서 정부가 직접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는 국회 쪽에서 주도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나은 것 아니냐”고 설명했다. 외국인 투자가나 통상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정부보다는 민의를 반영하는 창구인 국회가 훨씬 자유로운 입장이라는 것이다. 한편 오건호 정책보좌관은 “외국 자본에 대한 참여정부의 입장이 분명히 바뀐 것 같다”고 진단했다. 한국은행과 청와대, 정책기획위원회에서 외국 자본 문제를 다룬 보고서를 잇따라 낸 것은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는 “급전이 필요했던 외환위기 직후와는 달리 이제는 투기성 외국 자본을 막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공감대가 생겼다”며 “지금은 오히려 과잉 자본이 문제”라고 분석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보수 언론이 한목소리로 외국 자본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 자본 ‘바로보기’의 가장 큰 난점은 이들의 선악 구분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과연 외국 자본이 우리에게 득인지 해인지, 어떤 외국 자본이 ‘투기성’ 자본인지,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공통된 합의점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뉴브리지나 칼라일, 론스타에 대해서도 부실이 큰 은행을 인수해 리스크를 줄인 다음 절적한 매수자를 찾아 넘겨준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외국 자본이 고배당을 요구한다는 주장은 실증적인 근거를 결여한 ‘선입관’에 불과하다는 보고서를 펴내기도 했다. 박상용 증권연구원장은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 포럼’ 주최 토론회에서 “유상감자는 전망이 없는 업종에서 퇴출하기 위한 수순이며, 순조로운 퇴출이 어렵기 때문에 유상감자 등을 통해 퇴각 경로를 밟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국 자본의 문제점이 과장됐다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국 자본에 대한 견제가 재벌 개혁의 후퇴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은 정치권을 향해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한 보완조치보다는 출자총액 제한제도나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등의 규제를 풀어달라고 직설적으로 주문하기도 했다. 실효성이 없는 보완조치로 법석을 떨지 말고 전경련과 대한상의에서 주장해 온 불필요한 규제부터 풀어달라는 요구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곤혹스런 위치에 놓인 것은 민주노동당이다. 오건호 정책보좌관은 “민주노동당은 외국 자본 문제에서는 보수정당이나 언론과 한목소리를 내지만, 국내 기업의 경영권 보호를 위해 재벌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분명한 반대 입장”이라고 선을 그었다. 외국 자본 문제를 제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3각 구도’를 유지한다는 전략이다.
근본 처방은 기업체질 쇄신
개방경제체제에서 외국 자본에 대한 규제는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5%룰의 경우도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이다. 5%룰을 지키면서 들어오는 외국 자본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국내 자본의 육성과 지배구조의 개선 등 기업 체질의 근본적인 쇄신이다.
어쨌든 올여름 여의도는 외국 자본의 규제를 둘러싼 다양한 모색으로 어느 해보다 뜨겁게 달아오를 전망이다.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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