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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 갔다고요? 불티나게 팔립니다” 프로게이머와 의사가 공통적으로 무척 신경쓰는 장비는? 바로 모니터다. 게임 영상이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재현되는 모니터, 미세한 수술을 하기 위해 세밀한 부분까지 가장 잘 보여주는 모니터가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일본업체 손턴뒤 한국 ‘독주’ 그럼 이들은 무슨 모니터를 쓸까? 바로 나, 브라운관이다. 피디피, 엘시디 폼은 나지만 값이 비싸다. 나처럼 화질 좋고 나처럼 값싼 디스플레이는 아직 없다. ‘인기짱’은 내차지이다. 그래서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의 80%는 나의 몫이다. 벌써 100년째 디스플레이 챔피언으로 장수하고 있다. 문제는 내가 너무 뚱뚱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디피나 엘시디를 만든다고 난리였다. 나를 놔두고 다른 첨단 디스플레이 장치로 눈을 돌렸다. 오랫동안 나를 가장 많이 만들었던 일본 업체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피디피, 엘시디쪽으로 돌아섰다. 나를 버린 마쓰시타, 소니, 히타치 같은 일본 회사들은 요즘 땅을 치고 있다고 들었다. 내 덕에 그렇게 돈을 벌 때는 언제고 갑자기 생산공장을 줄이는 등 한물간 것처럼 홀대하더니 요즘 나의 진가를 보고는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9년부터 브라운관 생산 1위가 된 한국 업체들은 달랐다. 전자총 발사각을 넓혀서 내 두께를 줄였다. 50㎝던 32인치 텔레비전의 뱃살이 35㎝로 빠졌다. ‘슬림 브라운관’으로 내 이름이 바뀌었지만 값은 그대로다. 그래서 올해 처음 나왔는데도 완전평면 텔레비전을 빠르게 대체하면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연말까지는 200만대가 팔릴 전망이다. 슬림형·고부가 인기 상한가 한국 업체들은 컴퓨터용 브라운관 모니터에도 새 옷을 입혔다. 은나노로 코팅을 하고, 음이온 발생기를 달아줬다. ‘웰빙’ 시대에는 딱 맞는 제품이 될거라고들 한다. 그래서 요즘 나의 인기는 디스플레이 중에서도 ‘상한가’다. 현재 나를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브릭스’란 지역이다. 피디피나 엘시디는 비싸서 잘 안 사지만, 고화질· 고부가 브라운관으로 변신한 나를 부담없이 찾는다. 앞으로는 더 많이 사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여기에 디지털 방송이 세계적으로 퍼지면 내 인기는 더 높아질게 분명하다. 그래서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지 않는다. 고부가·고화질 브라운관으로 모습이 바뀔 뿐이다. 새로운 경쟁자들이 자꾸 도전하는데, 나라고 가만히 앉아만 있겠냐는 말이다. 내 몸값이 높아지면서 수익성도 당연히 좋아지고 있다. 더 비싼 평면 브라운관 비중은 지난해 41%에서 올해는 49%가 될 전망이다. 덕분에 나를 업그레이드한 한국 업체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삼성에스디아이와 엘지필립스디스플레이란 두 회사의 브라운관 점유율은 2001년 20· 24%에서 지난해 29· 27%로 각각 높아졌다. 전세계에서 팔리는 브라운관 10대 가운데 여섯대가 한국회사 제품이고, 조금 있으면 일곱대로 늘어날 판이다. 영업이익률도 2000년대 초반에는 10~12%였는데 최근에는 13~15%로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피디피나 엘시디는 가격 등락폭도 심하고 투자비도 엄청나지만 나는 공장 감가상각이 끝나 투자비용도 안든다. 브릭스 특수·디지털방송 ‘날개’ 얼마 전에는 티비도쿄란 방송국에서 한국의 슬림 브라운관을 다룬 ‘상식을 깨뜨린 브라운관의 역습’이란 프로그램을 내보냈을 정도다. 한국이 신규 투자없이 기존 생산라인을 활용해 경쟁력을 높인 점에 주목하면서, 한국 브라운관이 일본의 주무대였던 브라운관 업계를 휘어잡고 있다고 부러워했다. 한국 독주시대는 꽤 오래갈 것 같다. 일본 업체들은 오판을 하는 바람에 제 때 투자를 못했고 그래서 당분간 한국을 따라잡기 힘들 것이다. 전문가들이 그러는데, 한국 업체들이 적어도 2008년까지는 브라운관 세계 1위를 지킬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효자라고 나를 더 사랑해주었으니, 나도 효자 노릇 더욱 톡톡히 할 수 밖에.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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