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일부 진보적인 노동운동가들은 '외국인 노동자'를 '이주노동자'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같은 노동자인 이상,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 하다는 고민의 발로에서 그런 언어선택을 하는 것이겠지요. 어감의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그 언어에 담긴 철학을 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군요. 사실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언어'는 '식량무기화'입니다. 지난 2월 8일 미국 농무부 (USDA)에서 '세계곡물수급전망'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이후,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식량무기화' 위협을 경고하는 기사가 줄을 이었지요. 대안은 달랐지만 보수와 진보 모두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국내에서도 식자재 값이 크게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애그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식량가격의 급등'을 의미할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간단합니다. '애그플레이션'은 '식량의 무기화'로 인해 촉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많은 이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식량의 무기화'를 초래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발 경제위기 가능성이 고조되는 것을 '서브프라임 사태'라 부르고 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위기의 주된 원인이기 떄문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정확한 언어사용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애그플레이션' 사태에서 '식량의 무기화'를 유추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애그플레이션' 사태를 촉발한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바이오 에너지 생산에 따른 곡물의 '에너지원'화입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지난 2006년 연두교서에서 '석유중독'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지요. 지난해 미국은 8억 1천 3백만톤의 옥수수를 사용하여 바이오 에너지를 생산했습니다. 미국 옥수수의 30%가 바이오 에탄올 생산을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EU 또한 바이오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EU는 2010년까지 전체 경지면적의 15%를 바이오에너지 생산을 위해 전용하기로 했습니다.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처럼 많은 곡물이 바이오 에너지 생산에 사용되니 공급이 부족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두 번째 원인은 중국과 인도 등 신흥 개도국들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있습니다. 연 10%를 상회하는 이들 나라의 경제성장은 사료용 곡물에 대한 수요를 급증시키고 있습니다. 최근 농업경제연구원에서 발표한 '애그플레이션의 농식품 부문 영향과 대응방향'에 따르면, 중국의 돼지고기 소비량은 1990년 2,257만 3천톤에서 2006년 5,146만 7천톤으로 두배 이상 늘었고 쇠고기 소비량 역시 1990년 110만 1천 톤에서 2007년 775만 6천 톤으로 늘었습니다. 그 만큼 사료곡물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는데, 돼지고기와 쇠고기 1kg을 생산하기 위해 각각 사료곡물 2kg, 4kg이 필요하다고 하니 수요 증가폭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수요-공급 간에 심각한 불균형이 야기되고 있는 가운데, 기상이변으로 주요 곡물생산국 중 하나인 호주의 곡물생산이 급감하였습니다. 그 결과 곡물재고량은 10년 동안 가장 낮은 수준인 14.9%로 떨어지고 말았지요. 게다가 유가 상승으로 운송비 부담증가라는 악재가 겹쳤습니다. 앞서 인용한 보고서에 의하면, 걸프만에서 우리나라 항구까지 운항하는 선박의 해상운임료가 2006년에는 상품 톤 당 35.9달러였으나 현재는 무려 110달러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달러약세와 금리 인하로 투기자본이 곡물시장에 대거 유입되기도 했지요. 지난달 기록적인 상승세를 기록했던 콩과 밀 가격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아 각각 13%, 15% 하락하였는데 이처럼 곡물가격이 단기간 동안 널뛰기 하는 건 투기자본의 개입 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곡물의 공급물량도 상당히 증가하고 있지만 막상 곡물가격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 하는 것을 보면 투기자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지요. 앞으로도 투기자본의 향방에 따라 곡물가격이 급등하거나 급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각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우선 주요 곡물 수입국들은 곡물을 '사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면값이 오를 것이라는 소식에 대형마트에 있던 라면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주요 곡물 생산국들은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은 올 한해동안 한시적으로 밀, 벼, 쌀, 옥수수, 콩 등 57개 곡물에 적용되던 수출 장려금제를 폐지하고 오히려 5~25%의 수출세를 매기기로 했고, 러시아는 밀에 10%, 보리에 30%의 수출세를 적용하였습니다.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인 베트남도 지난해 7월부터 신규 곡물수출 계약을 금지했고 인도 역시 밀 수출을 금지하기로 했다는군요. 이를 보면, 곡물 수입국과 곡물 생산국 모두 나름대로 '합리적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식량이나 돈을 '무기화'해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끼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요 곡물 생산국에서 수출을 통제하고 '수출세'를 부과하는 주된 이유가 '자원 민족주의' 강화에 있다고 보는 건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각국이 자국의 물가안정을 우선시하고 있다고 보는게 타당하겠지요. 곡물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어느 나라에서나 정정 불안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 한데다 빈부격차가 훨씬 더 심한 신흥개도국에서는 그 가능성이 훨씬 더 크겠지요. 특히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중국으로서는 지극히 민감한 문제일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애그플레이션', 즉 말그대로 '고(高) 곡물가 사태'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게 아닙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시카고대 교수는 식량가격이 3분의 1 상승하면 부국은 생활수준이 3% 하락하는데 그치나, 빈국은 20% 하락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부국에 가까운 우리나라에서도 물가상승은 현실화하고 있지요. 더욱이 미국에서처럼 축산농가가 많은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애그플레이션' 사태를 통해 식량안보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설파하며 '식량무기화'의 위험성이 현실화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건 정확한 지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애그플레이션' 사태는 단순한 곡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물가상승 위험이 있으니 어떻게 좀 하라고 윽박지르는 것만으로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요 언론들은 국민의 불안감을 가중시키며 엉뚱한 데서 원인을 찾고 있으니 거시적으로 어떻게 올바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가장 쉽게 '무기화' 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외환'입니다.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를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 국가들이 메워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만약 중국이 달러를 정치적인 '무기'로 삼았다면 미국도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은근한 긴장관계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시장경제에 참여하는 모든 나라는 서로에게 의존하는 처지입니다. 미국의 경제위기는 중국경제에도 절대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자원의 '무기화'는 세계화 시대에서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산 마늘의 수입을 제한하자 중국에서는 반대로 우리나라 핸드폰 수출을 어렵게 했지요. 식량의 무기화가 왜 현실에서 쉽게 이루어지기 힘든 것인지 이제 현명한 독자들은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섣불리 식량을 '무기화'하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큰 코 다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삽니까. 돈도 못 벌고 식량만 움켜쥐고서 상대에게 큰소리를 친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이야기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나라에서만 식량이 생산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원의 '무기화' 같은, 전시를 방불케하는 섬뜩한 국수주의적인 용어는 쓰지 말아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삼아 자국 국민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유럽의 극우주의자 들이나 쓸 법한 용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덧붙이면, 가장 자주 '무기화'되고, 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자원'은 바로 '노동'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U보트로 영국의 곡물수급을 차단하려 했던 독일이 결국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노동자의 파업이었지요. 평상시 에도 대공장 노동자들이 단 하루만 자신의 '노동력'을 무기삼아도 수십억원 대의 피해가 발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의 무기화' 위험을 과장하며 노동자의 인권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무엇이 갈등의 원인인지를 먼저 정확히 직시할 수 있어야 진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요. '식량의 무기화' 논의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문제가 되는 건 고(高) 곡물가 사태로 인한 물가상승 압력이지 '식량의 무기화' 위험이 아닙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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