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5.06 13:00 수정 : 2005.05.06 13:00

일러스트레이션 권철.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도를 두고 제3세계에서 채택할 수 있는 성공 모델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한국 영화의 성공을 보고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도를 도입해 보자는 논의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미국이 그리고 할리우드가 한국의 스크린쿼터를 약화 또는 폐지시키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단순히 한국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크린쿼터제도의 세계적 확산의 위험성 때문이라면 약간 오버한 상상일까.

지난 2005년 4월4일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는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의 발언은 다시 한번 스크린쿼터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만들었다. 스크린쿼터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문제는 한국의 영화가 주목을 받고 한국 영화시장이 성장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고 한미투자협정의 추진과정에서 미국측의 집요한 공격 대상이 되어왔다. 논쟁은 스크린쿼터 자체의 폐지 아니면 온존의 질적인 판단을 둘러싼 논란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어떨 때는 쿼터 비율의 확대와 축소라는 양적인 논란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진행된 논쟁에서 스크린쿼터는 곧 국내 영화산업 보호 및 육성이며 스크린쿼터의 폐지, 축소는 국내 영화산업 보호 및 육성의 포기, 후퇴와 등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스크린쿼터는 무역정책 중 하나의 정책수단이며, 무역정책 수단에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관세를 부과하는 방법이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스크린쿼터가 수량할당이라는 무역정책수단 중 하나라면 다른 무역정책수단에 비교할 때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는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검토는 국내 영화산업 보호 및 육성을 전제로 한 것이며, 영화의 수입대체정책이 옳으냐 그르냐의 논쟁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과문한 탓이지만, 관세부과 방식은 그다지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영화산업의 교역에서 관세부과는 무역제한의 실효성이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제작비용은 엄청나게 높지만 복사하여 배포하여 상영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그다지 큰돈이 들지 않는다. 따라서 관세를 높게 매기더라도 해외 생산자와 배급자는 싸게 가격을 매김으로써 관세의 효과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수입 대체를 위한 유력한 정책수단은 국내 영화계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나, 배급시장에서 강제로 1년에 며칠을 의무상영하도록 하는 스크린쿼터등 2개의 대안이 남게 된다. 보조금이라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프랑스였다. 이에 비해 쿼터제라는 대안을 적극 활용한 것은 한국이다. 국내 영화계의 성장을 지원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2개의 수단을 사용한 결과, 프랑스의 경우 국내 영화의 점유율이 하락하고 할리우드 영화가 득세한 데 비해, 한국의 경우 국내 영화의 점유율이 높아졌다. 이처럼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보조금 지급의 경우 누가 보조금을 받을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바로 부딪힌다. 이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은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미술대회에서 심사위원이 미술전문가인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의 경우 바로 이런 방식으로 보조금 수혜자를 결정했다. 유명 영화감독과 영화평론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서 보조금 수혜자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 결정과정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대중의 영화 취향을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고 고급스러운 영화 취향을 나 홀로 추구하는 악명 높은 영화평론가들과,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추구하는 거장으로서 이윤을 추구하는 제작사 사장과 갈등을 빚는 영화감독이 모여서 결정한 수혜자는 그들의 취향에 맞는 감독의 영화이지 대중이 원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예술영화와 작가주의영화들이 정부의 세금 지원과 함께 쏟아져나왔지만 정작 프랑스에서의 국내 영화의 점유율은 계속 떨어져 갔다.


스크린쿼터제도는 누가 일종의 보조금을 받을 것인지를 전적으로 대중에게 맡기는 시스템이다. 마치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듯이 사람들은 7천~8천원의 돈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에 투표를 한다. 스크린쿼터에서는 정부의 세금이 필요 없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제작자에게 보조금과 비슷한 이윤이라는 상금을 안겨다준다. 스크린쿼터제도는 외국 영화의 위협에 맞서 한국 영화 전체에게 안정적인 시장을 제공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특정 감독, 특정 제작자, 특정 배우에게 안정적인 시장을 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한국 영화 내의 제작자, 감독, 배우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야기되고, 그 경쟁의 결과는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본 것과 같다. 외국으로부터의 경쟁을 제한하는 스크린쿼터제도의 성공이 경쟁은 좋은 것이라는 경제학의 일반적 원리를 바꾸도록 강요하는 증거이지는 않다. 경제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경쟁이 뛰어난 성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지 경쟁 속에 반드시 해외 경쟁이 포함되어야만 뛰어난 성과가 귀결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에 대해 양적인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지만 특정 장르 영화에 편중되어 있다거나 코미디와 같은 상업적 성격이 농후한 영화만이 다량 생산된다는 식의 비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대중문화, 상업문화 전반의 문제이지 스크린쿼터제도의 책임은 아니다. 스크린쿼터와 보조금 지급을 두고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스크린쿼터제도는 어떤 특정 영화에 대한 편향적 지원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조금제도는 앞서 언급한 프랑스와 같이 운영될 경우 예술영화, 작가주의영화를 지원하는 편향을 가진 제도이다. 이에 비해 스크린쿼터제도에서는 대중이 결정할 뿐 제도 자체의 편향성은 없다.

한국 영화의 성공을 스크린쿼터제도에 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주장이고 필자 역시 그런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스크린쿼터제도는 한국 영화가 뜨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제도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의 성공을 스크린쿼터에 한정하는 논변은 무너진다. 이전부터 스크린쿼터가 있었는데 성공한 시점은 왜 그 시기였느냐 라고 묻는다면 필자의 머릿속엔 바로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소재와 주제가 다양화되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유신과 그 뒤를 이은 군사독재정권하에서 다수의 사람과 거액의 돈이 상상력을 통해 결합되는 영화라는 장르 또는 산업은 철저하게 억압되었고 이런 조건에서 발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추가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의 성공이 스크린쿼터제도 없이 가능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국내 영화의 지원, 수입 대체의 목적을 달성하는 여러 정책수단 중에서 스크린쿼터제도는 다른 정책수단들보다, 특히 국내 영화 점유율의 잣대를 기준으로 할 때, 우월하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비가격적 규제방식보다는 가격규제방식이 우월하다는 선입감 또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 정책수단 중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스크린쿼터가 그 하나의 예이다.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도를 두고 제3세계에서 채택할 수 있는 성공 모델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한국 영화의 성공을 보고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도를 도입해 보자는 논의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미국이 그리고 할리우드가 한국의 스크린쿼터를 약화 또는 폐지시키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단순히 한국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크린쿼터제도의 세계적 확산의 위험성 때문이라면 약간 오버한 상상일까.


김혜원 국회 예산분석관 puttyclay@nabo.go.kr
1968년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세상을 항상 경제(학)적으로 해석하는 이코노(믹스)홀릭스이지만, 머릿속 한편에선 인문학적 상상력을 늘 꿈꾼다.

Futur Anterieur(푸뚜앙떼리요르)란 = ‘前미래’란 뜻으로, 미래 어느 시점의 특정한 변화나 행동을 위해서는 그에 선행하는 또 다른 미래의 변화나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