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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3 15:37 수정 : 2005.05.13 15:37

일러스트레이션 권철


아파트를 적극 지지, 옹호하는 지주들은 대개 작은 마을의 유지이거나 부자다. 이들에게 잘못 보이면 하나도 이로울 게 없다는 피해의식이 주민들 속에 잠재해 있다. 권력과 부 앞에 알아서 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삶의 과정에서 보이는 ‘강자와의 동일시’라는 행위 전략이다. 강자를 대적하여 나섰다가 괜히 피 보기보다는 슬슬 기는 것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을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선다 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한 지 벌써 2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주민 설문조사를 통해 주민들 84%가 이 계획에 반대하거나 우려함을 확인했고, 이를 바탕으로 주민총회를 열어 이 건설 자본의 비밀스런 탐욕을 폭로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이어 서명운동을 전개해 불과 2주일 만에 주민 387명, 전국의 시민사회단체 및 개인 1600여명 등 모두 2천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연대 서명을 얻었다. 지난 4월29일 연기군청에서 주민, 단체 대표들 10여명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으며 연기군수를 면담한 자리에서 인근 지역에서 난개발을 막고 전원마을, 생태도시 방향으로 가야 함을 강력히 촉구했다. 그리고 5월2일에는 충남도청을 방문하여 충남 도지사를 만나 난개발 예방과 생태도시 건설을 촉구한 뒤 충남도청 앞에서 일인시위를 벌였다.

지금까지 탐욕스런 건설 자본의 고층아파트 건설 계획에 대해 찬성론을 전개한 사람들의 논리를 여럿 접하게 되었다.

첫째, 내 평생 농사지어도 이렇게 많은 목돈을 한꺼번에 거머쥔 것은 처음이다. 땅 파는 거야 서운하지만 이제 갈수록 농사도 힘들고 아파트 온다 하니 목돈이 생겨 좋다. 평생 땅만 파다가 죽기보다 이제는 돈도 푸지게 쓰며 살고 싶다.

둘째, 고층아파트가 온다는 것은 동네에 아무래도 좋지 않지만 괜스레 내가 반대해서 계획이 무산되면 잔금을 못 받은 지주들이 나를 원수로 볼 것이 아닌가. 내가 이 나이에 뭐한다고 지주들과 사이가 나빠질 것인가. 혹시라도 배가 아파 반대한다고 할까 봐 직접 나서지는 못하겠네.

셋째, 고층아파트가 와야 사람도 많아지고 동네도 좀 깔끔해지고 고대, 홍대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좀 없어지지 않겠는가. 고층아파트가 오면 마을이 발전하겠지. 게다가 사람이 많아지면 아무래도 동네가 활기가 넘치지 않겠는가.


나는 지주나 지주 외의 주민들이 이런 시각을 갖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이라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농민들이 농사지어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두 산업자본가와 기득권층을 위한 수출지향적 경제 개발 전략의 결과이다. 그러니 농민들은 집단적인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데, 이제 수억, 수십억원의 땅값이라는 떡고물은 그러한 피해의식을 공격적으로 해소하는 데 최고의 미끼를 제공한다.

게다가 아파트를 적극 지지, 옹호하는 지주들은 대개 작은 마을의 유지이거나 부자다. 이들에게 잘못 보이면 하나도 이로울 게 없다는 피해의식이 주민들 속에 잠재해 있다. 권력과 부 앞에 알아서 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삶의 과정에서 보이는 ‘강자와의 동일시’라는 행위 전략이다. 강자를 대적하여 나섰다가 괜히 피 보기보다는 슬슬 기는 것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고층아파트야말로 동네 발전의 지름길이라 보는 입장인데, 이것도 사실은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 가는 것이 발전이고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낮은 주택이 불규칙하게 형성된 현재의 마을 모습은 그렇게 깔끔하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골목에서, 좁은 길에서 서로 인사하고 지나가고, 자동차나 자전거가 만날 때 서로 양보하고 지나가는 모습 속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인간미를 느끼며 산다. 그러나 높은 건물이 그럴듯하게 올라가면 그것이 발전이라고 보는 태도 뒤엔, 소박하고 누추한 집들의 모습에 대해 잠재적으로 가진 열등감이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는 “차라리 기존의 모든 주택까지 몽땅 사들여 마을 전체를 아파트 단지로 만들어버린다면 동네가 정말 발전하지 않겠는가”라는 논리도 편다.

돈의 권력 앞에 생동하는 삶의 과정을 포기하는 사람들, 또 그것이 파괴되는데도 온갖 논리로 미화시켜 자신의 두려움이나 괴로움을 은폐하려는 사람들이 측은하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삶의 터전인 이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지구)을 지키기 위해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 ksd@korea.ac.kr = 1961년생. 경영학(노사관계)을 공부하면서 돈의 경영학이 아니라 삶의 경영학을 고민하고 있다.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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