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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3 16:07 수정 : 2005.05.13 16:07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이코노미21> 이주노 기자

금감위, 과거 분식회계 ‘사면조치’자수하여 광명이 올까요

‘고해성사’ 유도하려면 역분식 허용 불가피…분식 터는 과정서 투자자 손해 불보듯

경제분야에서도 과거 청산 작업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기간은 앞으로 2년. 방법은 훨씬 간단하다. 그동안 남몰래 분식회계를 감춰두었던 기업들은 각자 알아서 수단껏 털어버리면 된다. 골치 아픈 진상조사도 없다. 불법을 동원하는 것도 자유다. 행여 위법 사실이 실수로 적발돼도 투자자들이 절대로 눈치 챌 수 없게 눈감아준다.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투자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금융감독위원회다. 정부가 나서 법질서를 뒤흔들고 있다는 시민단체의 반발이 매섭지만, 금융감독위원회의 의지는 분명하다. 논란의 출발점은 우여곡절 끝에 올 초 도입된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다.

증권 집단소송제의 도입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96년이다. 무려 10년 가까이 이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국내 기업들이 ‘분식회계’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분식회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증권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면 무사할 수 있는 기업은 거의 없다는 것이 재계의 우려였다. 집단소송제는 투자자들이 기업의 불법행위로 본 피해를 직접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을 획기적으로 넓혀주고 있다. 이를테면, 분식회계 사실이 밝혀져 특정 기업의 주가가 100원 하락했다고 하면, 투자자들은 대개 피해금액이 작기 때문에 소송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식을 100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피해금액이 1만원밖에 안 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소송을 해봐야 오히려 소송비용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 투자자가 100만명이라면, 전체 피해금액은 무려 100억원이 된다. 바꿔 말하면, 해당기업이 100억원의 부당한 이득을 얻게 되는 셈이다. 집단소송은 피해자들이 집단적으로 소송을 제기해 한꺼번에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투자자들에 의한 감시가 한층 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 분식 2년 간 유예기간 두어

▲ '기업 경영 선진화를 위한 경제계의 다짐'에 참석한 재계 대표들. 왼쪽부터 김용구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 강신호 전경련 회장,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이수영 경총 회장. <한겨레> 이종찬 기자



올 초 가까스로 증권 집단소송제가 도입됐지만, 2007년까지는 자산 2조원 이상 82개 기업으로만 적용 대상이 한정됐다. 재계의 요구대로 ‘과거 분식’도 앞으로 2년 동안 소송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제 주어진 2년의 유예기간 동안 과거 분식을 털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분식을 터는 것은 쉽지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분식회계의 ‘수법’은 다양하다. 재고자산을 부풀릴 수도 있고, 매출액을 과대 계상하거나 부채를 감추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익을 부풀리기 위해서다. 분식회계로 한번 부풀려진 이익은 이익잉여금 형태로 재무제표에 계속 남게 된다. 분식회계를 해소하면 그 즉시 그 해 이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더구나 증권 집단소송에서만 제외됐을 뿐 분식회계로 인한 민·형사상 책임은 그대로 떠안아야 한다. 분식회계를 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 자체가 기업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도 있다.

때마침 금융감독위원회가 고민에 빠져 있는 기업들 구하기 위해 나섰다. 어쨌든 한국 경제를 이만큼 키워온 주역이 바로 이들 기업이며, 과거에는 분식회계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현실론을 앞세웠다.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은 “기업활동을 돕는 것도 금융감독당국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윤 위원장이 내놓은 방안은 앞으로 2년 동안 분식회계를 자진 수정하는 기업에 대해 회계감리를 면제하고, 제제도 경감해 주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를 묻지 않을 테니 ‘자수하여 광명을 찾으라’는 뜻이다. 금감위는 이번이 기업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이를 귀담아들을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금감위의 사실상의 ‘사면조치’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쟁점1. 금감위의 분식회계 ‘사면조치’는 합법적인가?

지난 4월27일, 금융감독원에서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소장과 전홍렬 금융감독원 부원장 사이에 뜨거운 설전이 벌어졌다. 분식회계 사면조치의 문제점을 따지기 위해 참여연대측에서 항의 방문에 나선 것이다. 장장 4시간 동안 이어진 이날 논쟁에서 핵심적인 쟁점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금감위의 조치가 위법인가의 여부다. 금감위는 지난 3월 국회에서 증권 집단소송법을 개정하면서 과거 분식에 대해 2년 동안의 유예기간을 둔 것은 기업들에게 이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금감위는 정당하게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구체화해 실행했을 뿐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김상조 소장은 “집단소송의 입법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참여연대”라며 “증권 집단소송법 개정은 과거 분식을 2년 동안 집단소송의 대상에서만 제외한 것일 뿐, 과거 분식의 사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못박았다. 적용 유예와 사면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채수찬 열린우리당 의원도 “금감위의 명백한 월권”이라며 “사면이 정말 필요하다면 국민에 대해 정치적인 책임을 지는 국회나 대통령이 판단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 <이코노미21> 박미향 기자


하지만 금감위가, 이를테면 ‘분식회계사면특별법’을 추진하는 대신 내부 감리규정을 고치기로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특별법을 통한 분식회계 사면은 위헌 소지가 있는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일괄사면을 하면 분식회계로 손해를 본 피해자들의 기본권인 소송을 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데다, 분식회계로 이미 처벌을 받은 기업들과의 형평성도 문제가 된다. 재계에서도 이미 사면법 제정 요구를 일찌감치 접은 지 오래다.

더구나 금감위는 분식을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분식을 하는 ‘역분식’까지 허용해 위법 논란을 가중시켰다. 현행 기업회계 기준에도 분식을 해소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있다. 전기오류수정 항목에 분식금액을 기재하고 전기 재무제표를 다시 작성하면 된다. 문제는 이 방식을 사용하면 분식회계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는 것이다. 금감위는 기업들의 자발적인 ‘고해성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역분식 허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역분식을 활용하면 투자자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얼마든지 분식을 털어낼 수 있다. 그러나 역분식은 기업회계 기준을 어기는 명백한 불법행위다. 금감위가 내부규정을 통해, 기업회계 기준 준수 여부를 감독하도록 한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 자체를 위반하는 결과가 돼버리는 것이다.

금감위의 조치가 사실상의 ‘사면’인가도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됐다. 금감위 산하 증권선물위원회 위원인 곽수근 서울대 교수는 “지금처럼 감리를 엄격하게 하는 상황에서는 회계법인이나 기업들이 과거 분식을 계속 끌고 갈 가능성이 높다”며 “자발적으로 분식을 수정한 기업에 감리를 면제하고 제제를 경감해 줘도, 민사적인 책임은 그대로 남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금감위가 개정한 내부 규정에는 민사적인 책임까지도 면제해 주는 사실상의 사면조치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감리과정에서 과거 분식을 수정한 것이 확인될 경우 이를 위반사항으로 지적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만약, 금감원이 회계감리를 통해 분식회계를 발견하고도 이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일반 투자자들은 분식회계가 있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분식회계 적발이 누구나 ‘딱 보면 알 수 있는’ 단순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사소송을 통해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이다.

어쨌든 과거 분식을 터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일반 투자자가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 분식을 ‘쥐도 새도 모르게’ 털더라도, 그해 손익에 반영돼 배당이 줄거나, 주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상조 교수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더라도 전체가 좋아진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발상이 더 큰 문제”라며 “참여정부가 경제분야에서만큼은 권위주의적인 박정희식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지적했다.

쟁점2. 분식회계 드러나면 100% 집단소송 대상이다?

금감위가 감리 면제와 지적 면제에 집착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곽수근 교수는 “분식회계가 감리과정에서 지적당하면 100% 집단소송에 걸려, 패소할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나서 집단소송을 부추길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금감원의 감리 결과가 집단소송의 핵심적인 근거로 본의 아니게 악용될 수 있는 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금감원은 매년 상장, 등록 법인 가운데 10%를 무작위추출해 회계감리를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무작위추출을 폐지하고, 앞으로는 사전심사를 통해 감리 대상을 선정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분식회계가 증권 집단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고 지적한다. 우선 증권 집단소송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누리법무법인 김주영 변호사는 “증권 집단소송은 5~10년 걸리는 장기 소송인 데다, 우리나라의 경우 패소하면 피고측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기업들의 우려처럼 소송이 남발될 위험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 지난해 3월 열린 현대상선 주주총회. 현대상선은 지난해 12월 분식이 적발됐지만 주가는 오히려 크게 상승했다. <한겨레> 황석주 기자


미국에서 증권 집단소송이 빈발하는 것은 미국 특유의 ‘디스커버리제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디스커버리제도는 원고측에게 각종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리를 부여한다. 일단 소송을 걸어놓고 기업을 들쑤시기 시작하면, 기업에서는 다른 문제들이 들어날 것을 우려해 적절한 금액에서 합의에 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증권 집단소송법은 이런 제도를 채택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재계의 요구를 수용해 이중 삼중의 남소방지장치를 갖춰놓고 있다.

또한 분식회계를 증권 집단소송으로 가져가려면 피해 사실이 분명해야 한다. 분식회계 행위 자체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다.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 주가가 폭락하거나 회사가 거덜 날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분식회계가 드러나면 주가는 오히려 상승한다. 김성은 경희대 교수는 “현대상선이나 KCC, 하이닉스 모두 분식이 적발돼 처벌을 받고 나서 주가가 올랐다”며 “투자자와 채권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불확실성이 해소됐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현대상선은 지난해 12월22일, 1조4513억원의 분식회계가 적발돼 20억원의 과징금을 물었지만 주가는 오히려 크게 상승했다. 물론 같은 해 3월에도 이미 6224억원의 분식회계 사실을 ‘고백’한 적이 있고, 처벌 수위도 낮은 편이었지만, 시장 반응이 의외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 4월20일 719억원 규모의 분식회계 사실을 스스로 밝힌 대한항공의 경우도, 주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현대상선은 올해 3월 전기오류수정을 통해 과거분식을 완전히 해소했다.

김성은 교수는 “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털도록 유도하는 별도의 조치가 과연 필요한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계속 기업으로 충분히 존속할 수 있고, 수익력이 있다면 과거의 재무제표를 바로잡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분식회계의 내용과 규모가 기업마다 다를 수는 있다. 김 교수는 “분식회계 사실이 밝혀지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정도의 기업이라면 투자자나 채권자의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노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의 규율을 강화하는 것만이 주식시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지적이다.

금감위의 적극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최근 분식회계 사실을 자진 공시한 대한항공도, 금감원의 감리과정에서 적발돼 어쩔 수 없이 자백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업들은 미리부터 2007년 치러질 다음 대통령 선거를 계산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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