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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풍력 발전소가 들어설 대관령 삼양목장 전경. 강원도가 시범 설치한 풍력발전기 4기가 멀리 보인다. 정석구 기자 tw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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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금융외면에 ‘자가발전’4년여
20일 금융약정·주주협약절차 마무리
지난 2000년 11월 초.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에 있는 해발 1400m의 황병산에서 대관령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백두대간 길. 50대 후반의 중년 남자 2명과 노랑머리 외국인 1명이 몸을 움츠리며 삼양목장 쪽으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이정수 유니슨 회장, 이건우 부회장, 풍력발전 전문회사인 독일 라마이어의 롤란트 리스 프로젝트 매니저. 벌써 겨울 냉기를 품은 제법 세찬 바람이 해발 1000m가 넘는 대간 마루금을 걷는 이들의 얼굴을 때렸다. 풍속 초속 8~12m. “이 정도 바람이면 아주 좋은 조건입니다. 한번 해봅시다.” 풍력발전 전문가인 리스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국내 최대 규모인 98㎿의 강원풍력발전소 건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조로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상 밖의 암초들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길이 없으면 새로 뚫고, 암초가 나타나면 깨부수고, 길이 막히면 돌아가기를 무려 4년 반. 숱한 난관을 헤치고 이제야 겨우 종착역에 도착했다. 20일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강원풍력 금융 약정식 및 주주 협약서 체결식’을 마지막으로 모든 공식절차를 마무리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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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허가 받는 데만 무려 3년=2001년 1~8월 대관령 삼양목장과 한일목장에서 실시한 풍력사업 타당성조사 결과, 평균 풍속이 초속 7.9m로 대만족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2년 4월 주무부처인 산업자원부에 발전사업 허가를 신청하고, 그해 6월 허가가 났다. 겉으로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던 사업은 곳곳에서 장애물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유니슨이 출자해 만든 강원풍력발전의 사장을 맡은 이건우씨에게 우리나라는 결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었다. “처음 대규모 풍력발전 사업을 하려다 보니 관련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이 사장은 관련 부처를 쫓아다니며 우선 제도 정비에 주력했다.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 담당 공무원도 모르는 일을 함께 공부하고, 한편으론 설득하면서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그가 관련돼 개정된 법만 해도 전기사업법, 대체에너지 개발 및 이용·보급 촉진법, 조세특례제한법, 산지관리법,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 등 5개나 된다. 공무원들은 그래도 설명하고 설득하면됐지만, 입법권을 쥐고 있는 국회는 속수무책이었다. 산지에 대체에너지 시설 설치를 가능하도록 하는 산지관리법 개정안의 경우, 2002년 4월 국회에 상정됐지만 방탄국회 등으로 처리가 미뤄지다 그해 12월에 통과됐다. 그나마 1년 뒤인 2003년 10월1일부터 발효된다는 부칙 조항이 붙어 있었다. 꼼짝없이 1년을 허송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찾아다닌 행정기관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주무부처인 산자부는 물론이고 환경부, 산림청, 농업진흥청, 강원도, 평창군 등등 이건우 사장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안도 환경성 검토, 초지전용 허가, 산지전용 허가, 국유재산 사용 허가, 개발행위 허가 등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풍력발전기 날개가 돌면서 군사 레이더 전파를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군부대의 지적에 따라 국방부도 수 차례 방문했다. 결국 발전사업 허가를 신청한 지 3년 만인 지난 4월 초에야 겨우 행정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 사장은 “고위직 공무원 출신인 나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데,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어려움을 털어놨다. 관련 제도없어 ‘맨땅 헤딩’법개정만 5개
은행 문턱 ‘눈물’천신만고 끝 자금조달
환경단체 순례 “자연훼손 최소화”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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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 사리는 국내 금융기관들=인·허가 받는 일보다 더 힘든 것은 자금 조달 문제였다. 총사업비가 1604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풍력사업이다 보니 국내 은행들이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강원풍력 앞으로 배정된 연리 2.75%의 에너지이용 합리화자금 400억원조차 받기가 어려웠다. 은행을 통해 받아야 하는데 은행들이 취급을 꺼렸기 때문이다. 만일 강원풍력이 이 돈을 갚지 못하면 은행이 대신 물어줘야 하기 때문에 담보나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요구했다. 신용보증기금에 찾아가니 사업타당성 검토를 하는 데 1년6개월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산업은행과 신한은행 등도 주판알을 튕기다 결국 포기했다. 한달여 전인 지난 4월에야 프랑스 금융기관인 비엔피(BNP)파리바은행과 기업은행이 공동으로 주간사를 맡아 자금 조달 문제를 겨우 해결했다. 투자금 모으기는 그보다 더 어려웠다. 전체 사업비 1604억원 중 산자부 정책자금 400억원, 강원풍력 자본금 378억원 외의 800억원은 비엔피파리바가 모두 외국에서 조달했다. 400조원이 넘는다는 국내 유동자금은 구경할 수도 없었다. 자금 조달을 담당한 유니슨 관계자는 “국내 은행들은 일정 수익률이 보장된 투자만 할 뿐 풍력발전 같은 새로운 사업에 대한 리스크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국내 은행들의 ‘프로젝트 파이낸싱’이 얼마나 한심한 수준인지를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 대체에너지냐 환경보호냐=2001년 대관령에서 풍력발전 사업 타당성조사를 벌이자 환경단체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신재생에너지인 풍력도 좋지만 왜 하필 백두대간인 대관령이냐였다. 이 사장이 환경단체들을 하나하나 찾아나섰다. 환경연합, 녹색연합, 백두대간보전회, 환경정의 시민연대, 에너지시민연대 등등. 풍력발전소를 대관령에 세워도 추가적인 자연훼손은 거의 없다는 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미 목장터가 들어선 초지일 뿐 아니라 연결 도로도 갖춰져 있어 새로 도로를 뚫을 필요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대부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공식석상에서는 반대 목소리를 냈다. 환경단체들마다 의견도 조금씩 달랐다. 결국 2002년 1월 환경연합 등 관련 환경단체들이 함께 모여 의견을 조율했다. 환경단체들끼리 격렬한 토론을 거쳐 대관령 풍력발전소 설치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녹색연합의 최승국 협동사무처장은 “풍력발전도 필요하지만 백두대간 마루금을 훼손하는 것은 안된다는 입장이었다”며 “마루금에서 300m 이내는 안된다는 의견을 냈지만 현지 지형 여건상 지켜지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국회가 달려들었다. 결국 올 1월 국회 환경경제연구회 주최로 정부 관련 부처, 지자체, 환경단체, 에너지관련단체 등이 합동으로 정책 심포지엄을 열었다. ‘환경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한다’는 조건을 붙여 사업 추진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 사장은 여전히 환경단체들에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풍력발전도 좋지만 어느 정도의 환경 훼손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양목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두대간 길목의 전망이 가장 좋은 선자령(1200m)에는 발전기 설치를 스스로 포기했다. 환경 보전과 신재생에너지 개발이라는 서로 충돌하는 두 과제를 얼마나 조화롭게 풀어갈 것인지는 영원한 숙제다. 정석구 기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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