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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마케터 김아무개(35)씨는 한 외국계 생명보험사에 취업하려고 지난해 면접장에 나갔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면접시간 내내 업무와는 상관이 없는 개인 신상을 캐묻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것이다. “아들이 9살밖에 안 됐는데 왜 호주로 돼 있죠? 남편과는 이혼했나요, 아니면 사별했나요? 여성이 가장이면 가정을 누가 돌보죠?” 면접시간 10여분 동안 쏟아진 물음은 대부분 자신의 결혼 내력과 가족의 신상정보에 대한 것이었다. 텔레마케터로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았고, 어떤 강점을 지니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김씨는 그냥 이를 감내해야 했다. 대기업 75% ‘약자’에 가족정보 요구
‘능력중심’삐끗…사생활보호장치 시급
면접장에서뿐 아니다. 취업 희망자들이 입사원서를 쓸 때부터 맞닥뜨려야 하는 과제다. 입사원서에 본인의 인적사항은 물론, 재산과 병역면제 사유, 가족 이름과 직장·직위, 심한 경우 가족들의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까지 적어야 한다. 대우조선해양의 계열사인 웰리브는 입사 희망자들에게 주민등록등본 두 통과 호적등본 한 통을 내라고 요구한다. 단독 세대주일 경우 부모와 형제의 주민등본을 별도로 내야 한다. 포스코 계열사인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은 사원을 뽑을 때 가족 개개인의 주민번호와 함께 가족의 국적과 여권번호까지 파악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회사가 마찬가지다. 법무법인 지평의 이은우 변호사는 “기업이 우월적 지위에 있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개인 정보를 과다하게 요구하고 있다”며 “이는 결국 편견과 차별을 초래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취업 희망자들은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과 ‘목적별 신분등록제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이 지난 2일부터 17일까지 벌인, 30대 그룹 소속 기업 177곳의 입사지원서 가족정보 수집 모니터링 결과를 보면, 기업들이 취업 희망자들에게 요구하는 개인 및 가족의 정보가 과다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조사 결과, 기업 177곳 가운데 132곳(74.6%)이 입사 지원자의 가족관계와 가족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항목별로는 가족 이름과 관계를 파악하는 경우가 70.1%(이하 복수응답)로 가장 많았고, 가족의 직업(직장명), 나이(생년월일), 학력(출신학교), 직장과 직위, 구직자와의 동거 여부를 묻는 곳도 절반이 넘었다. 이에 더해 형제자매 관계 19.2%, 결혼 여부 18.6% 등의 차례로 여러 민감한 정보를 수집해왔다. 또 가족들의 주민번호를 요구하는 경우가 4.5%, 부모의 생존 여부를 묻는 경우가 1.7%에 달했다. 심지어 가족 개개인의 연락처를 요구하는 기업(1.1%)도 있었다. 씨제이푸드빌, 씨제이투자증권, 동부한농화학, 동부정밀화학, 동부파인셀, 포스코 계열 포항산업과학연구원, 싸이버로지텍(한진 계열), 지오씨티에스(대우건설 계열) 등의 회사는 가족들의 주민번호를 요구했으며, 롯데슈퍼·대우조선해양·웰리브 등은 주민등본과 호적등본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들은 인력 채용의 초점이 가족관계나 성장배경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활동성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해명한다. 실제로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 이후 삼성 등 몇몇 기업은 가족들의 인적사항과 재산 및 병역면제 사유 등의 항목을 없앴다. 그러나 아직도 기업들 대부분은 가족관계 등 불필요한 항목을 관행처럼 유지시키고 있다. 입사지원서에서 가족관계 등을 없앤 기업도 인성평가라는 명목으로 면접과정에서 지나치게 자세한 신상자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인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엘지 관계자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성장배경 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직까지 가족의 이름과 관계, 직업 등을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혼 경력이 있는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게 자세한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심적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차별의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노회찬 의원은 “기업의 무분별한 개인 및 가족 정보 수집은 양부모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가족만이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가족은 무엇인가 결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편견으로 작용하고, 또 그로 인한 차별을 부를 수 있다”며 “특히 채용이 확정되지도 않은 구직자의 방대한 개인정보를 기업 차원에서 수집·관리하는 것이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고 있어 개인 사생활권 침해를 예방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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