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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권석 기업은행장이 연초 서울 구로구 한 호텔에서 지역 중소기업 대표 200여명을 초청해 은행의 중소기업 지원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기업은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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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가가 상승하고 백화점 판매가 늘어나면서 경기 회복 조짐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이 놓여 있는 상황은 여전히 한겨울이다. 올 들어 은행들이 앞다퉈 중소기업 지원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일부 우량 중소기업들을 제외한 대다수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돈 구경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전북 익산에 있는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최근 본점에서 중소기업 설 자금 지원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히려 한숨만 나왔다고 했다. 연말 결산을 앞두고 본점으로부터 무차별적인 대출 회수 지시를 받은 게 바로 얼마 전인데,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울컥 들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는지,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시중은행의 일선 지점장들한테서 들어봤다. #1 “하고 싶어도 못한다” 대구에 있는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수익성 위주로 완전히 재편된 현행 은행 구조 아래서는 중소기업 대출을 제대로 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지점장은 고령자가 많아 언제나 구조조정 대상 1순위”라며 “지금처럼 본점에서 매일매일 실적을 가지고 지점 순위를 매기는 상황에서는 지점장들이 부실만 줄여도 본전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소기업 대출이라는 모험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수많은 중소기업 가운데서 옥석을 가려 돈을 빌려줄 만한 업체를 고르려면 거래하는 중소기업과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데, 길어야 2년 정도인 지점장 임기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지점에는 중소기업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고 대출을 결정할 인력도 없어, 구조적으로 제대로 된 대출이 불가능한 구조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은행들이 매출과 담보액 등을 숫자로 쳐넣으면 자동으로 대출 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신용평점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결국 인건비 등 경비를 줄이려는 목표에서 비롯됐는데, 이를 거꾸로 돌리는 게 가능하겠느냐”고 되물었다. #2 “중소기업 부실 책임, 은행도 져야 한다” 전북 익산의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최근의 중소기업 부실은 은행들이 조장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현재 시중은행들의 중소기업 대출 구성을 보면 제조업체는 보통 4분의 1 정도고, 나머지는 음식점, 모텔, 목욕탕 등 중소 자영업자들이다. 카드회사들이 신용불량자들을 양산한 것처럼, 은행들이 2~3년 전 가계대출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이들 중소 자영업자들을 상대로 앞뒤 안 가리고 대출 경쟁을 벌였다. 은행 직원 말만 듣고 퇴직금을 몽땅 쏟아부은 사람들도 많다.”
그 뒤 내수 침체로 중소 자영업자들이 자금난에 빠지자, 은행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시치미를 떼고 등을 돌리고 있다. 물론 중소기업들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중소기업 대출은 워낙 변수가 많아 눈 감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 같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대출을 원하는 중소기업 가운데 사장 개인 재산과 기업 자산조차 명확하게 분리가 안 돼 있는 경우가 많고, 재무제표도 엉성한데다 외부 신용평가기관의 신용정보도 이용할 수 없는 업체들이 부지기수다. 그냥 찾아와서 사람 하나 보고 대출을 해달라는 식이면 어떻게 대출을 해줄 수 있겠나?” #3 “그래도 길을 찾아야 한다” 기업은행 부평지점의 정세현 지점장은 요즘 관내 공단지역을 도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대부분 대출 신청을 한 기업들을 기습 방문하는 일이다. 갑자기 찾아가면 그 기업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한 전자부품 업체 사장이 신용대출을 해달라며 정 지점장을 찾아왔다. 매출이나 현금흐름 등 외형적인 지표가 부적격인데다, 연체 경험까지 있었다. 그러나 젊은 사장은 “단기적인 유동성 문제이니 조금만 도와주면 대출을 갚을 수 있다”며 끈질기게 매달렸다. 정 지점장은 어느날 오후 몰래 그 업체를 찾아갔다. 마침 공장 노동자들이 식당에 모여 회사에서 제공한 간식을 먹고 있었는데, 사장 앞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고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봤는데, 깔끔한 분위기에 예쁜 꽃이 꽂혀 있는 화병과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정 지점장은 이처럼 직원들을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회사라면 뭔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본점을 설득해 5억원을 신용대출로 내주었다. “어려울 때일수록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중요하다. 마침 요즘 경기도 조금씩 풀려가고 있지 않나? 한동안 없었던 시설자금 대출 신청이 부쩍 들어오고 있고, 공장 터를 매입하겠다는 사람도 제법 많다. 이럴 때 지점장이 아무 권한 없다고 두 손을 놓을 게 아니라 조금만 적극적으로 나서면 경기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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