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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7 19:41 수정 : 2005.02.07 19:41


소득 느는데 자살증가율 세계 1위…GDP 대신 행복지수 달성이 핵심

1인당 국민소득 1만3천달러 시대에 자살자 증가율은 세계 1위란다. 허리띠 졸라매고 놀고 싶은 것 참아가며 악착같이 돈 벌어 강남에 집 사고 아이들 고액 과외시켜 명문대에 보냈더니 식이장애, 우울증에 걸려버렸단다. 국민소득이 많은 나라, 가계소득이 많은 가정이라고 꼭 살맛 나는 건 아니란다. 미국의 학자들은 GDP, 즉 국민계정이 아니라 국민웰빙계정, 바로 행복지수로 나라를 운영하자고 주장한다. ‘오, 베이비~ 행복에 충실해.’

1894년 겨울 서울. “더럽고 악취 나는 수챗도랑은 때가 꼬질꼬질한 반라의 어린아이들과 수채의 걸쭉한 점액 속에서 뒹굴다 나온 크고 옴이 오른, 눈이 흐릿한 개들의 즐거운 놀이터이다. 이런 골목길에는 조그만 생활용품이나 아닐린 염료로 불길이 너울거리는 무늬를 입힌 알사탕 따위를 팔러다니는 방물장수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상품들을 짊어지고, 질퍽거리는 곳에 깔 널빤지 몇 장을 들고 다니는데, 그들 상품의 가격은 전부 해야 1달러쯤 된다.”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버드 비숍)

1945년 여름 서울. “경성의 하숙생활은 참담했다… DDT라는 신묘한 가로만 있었던들 그 많은 학생들이 얼마나 편안한 잠을 자고, 얼마나 많은 공부를 더 할 수 있었을까? 그런 가루가 없던 일제 말엽에는 빈대가 인간을 지배했다. 인간은 빈대 앞에서 속수무책이어서, 인간보다 빈대의 진화가 앞서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빈대와 이에 뜯어먹힌 몸은 홍역 앓는 애기 몸처럼 언제나 볼긋볼긋한 반점으로 덮여 있었다.”(<역정: 나의 청년시대>, 리영희)

1960년, 한국 개인의 연간 소득은 93달러였다. 89년에 1인당 국민소득(GNI)은 5천달러, 95년에 1만1천달러, 2003년엔 1만2600달러를 넘어섰다. 도시 근로자 가구의 월 평균 소득은 81년 28만원이던 것이 91년에 115만원, 2003년에 294만원에 이르게 됐다. 국민의 실질적 구매력으로 평가해 보면(구매력평가지수, PPP) 지금 한국 사람들은 스페인, 이스라엘, 뉴질랜드, 그리스와 비슷한 소비·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다.

교육 수준, 주거 안정도도 매우 높다. 25살 이상 인구 중 대졸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80년에 10.2%였던 것이 2000년엔 24.3%가 됐다. 건설교통부가 집계하는 주택보급률은 85년 71.7%에서 2002년엔 100%를 넘어섰다. 한국의 교육, 주거환경은 비숍 여사가 서울 거리를 걸었을 무렵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 와 있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간다. 2002년 한국의 자살증가율은 OECD 국가 중 1위, 자살사망률은 4위로 올라섰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사망자수 즉 자살사망률은 89년 7.1명에서 95년 10.7명, 2003년 22.8명으로 늘었다. 연간 35만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그 중 1만932명이 자살에 성공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1분30초에 1명씩 자살을 시도하고 48분에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자살은 92년엔 사망 원인 10위였으나 2003년엔 5위가 됐다.

이런 추세는 한국 경제에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 속도를 보이고 있는 와중에 자살이 20대 사망 원인 1위로 올라선 것이다. 2003년 연령별 사망자 대비 자살자 비율은 20대에서 25.8%로 가장 높고, 30대에서 20.3%, 10대에서 16.9%, 40대에서 10.8%를 차지했다. 50% 이상의 연령층에선 사망자 중 자살자가 6% 미만이었다.

전문가들은 국가적 생산성 저하를 우려한다. 서동우 보건사회연구원 건강증진연구팀장은 “현재 한국의 청장년 인구는 노동 생산성이 높고 가족 부양률이 높아 이들의 자살이 늘어나면 노인 부양, 교육 등 사회가 부담해야 할 몫이 그만큼 높아진다”고 말한다. 또 자살 충동 전에 일어나는 우울유발률이 높아지면 노동 생산성은 낮아진다.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인은 어디서 왔을까?

경기, 사회 급변이 자살률 높여

한국처럼 급작스럽게 자살률이 높아진 나라에는 공통점이 있다. 경기가 갑자기 침체되거나 정치 시스템이 갑자기 바뀌는 등 경제, 사회 급변기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서동우 팀장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옛소련 지역과 중국 등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은 지역에서 자살률이 빠르게 높아졌다”며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빈부 격차가 상대적 박탈감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에 반해 한국, 일본, 중국 동부 등 아시아에서도 시장체제가 발달한 지역에서는 경기, 특히 내수 변동이 자살률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83년 이후 내수경기를 나타내는 도소매 판매증감률과 자살률의 관계는 -0.78로, 내수가 급격하게 침체할 때 자살률이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IMF 외환위기가 일어난 98년, IT 붐이 꺼지면서 경기가 급강하한 2001년엔 자살이 크게 늘었다.

자살률과 경제성장률도 상당한 상관관계(-0.62)를 보였다. 자살률과 지니계수 즉 소득불평등도의 상관계수는 0.48로 보통 정도의 상관도를 나타냈다. 상관계수가 ±0.4~0.6이면 상관관계가 보통임을, ±0.6 이상이면 높음을 뜻한다.

그러면 경제성장률, 내수성장률을 높이고 소득 평등도를 높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줄어들까? 과거 경제성장률이 높아졌던 시기의 자살사망률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경제와 내수성장률이 높았던 94년, 99년, 99년, 2002년에도 자살사망률은 그 전년보다 그다지 낮아지지 않았다. 98년 외환위기 직후인 99년에는 자살사망률이 낮아졌지만 그 외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고 심지어 2002년엔 내수, 경제가 모두 성장했는데도 자살사망률은 높아졌다. 2003년엔 지니계수가 낮아져 근로소득 계층의 소득 불평등이 개선됐는데도 자살자는 줄지 않았다.

숫자만으로 분석해 봤을 때 자살 충동을 높이는 건 급격한 경기 침체다. 반면 경기 호전이나 소득 불평등도 개선이 자살 충동을 억제해 주진 못한다.

‘경제 성장, 부=행복’은 사회적 미신

사실 소득과 행복이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연구, 조사는 그동안 끊임없이 나왔다. 지난해 미국 미시간대 사회조사연구소는 세계 82개국의 행복과 삶의 만족도를 조사했다. 세계행복지수 1위는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 2위는 멕시코였다. 3~7위는 덴마크,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스위스, 북아일랜드 등 유럽 국가들이 차지했다. 미국은 15위, 일본은 42위, 중국은 48위, 한국은 49위였다. 손꼽히는 빈국 중 하나인 나이지리아는 19위를 기록했다.

루트 반호벤 에라스무스대 사회학 교수는 지난해 12월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국가가 부자이거나 수입이 더 많다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다고 행복해하는 것은 아니었다”며 “행복하다고 응답한 사람들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 특성은 결혼했거나 동거 중인 커플이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상담자들도 이런 분석에 동의한다. 서울 서초구에서 식이장애, 부부 문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상담하고 있는 김준기 결혼지능연구소 부소장(마음과 마음 병원)은 “거식증, 폭식증 등 식이장애를 일으키는 청소년, 청년의 부모들을 보면 대개 악착같이 살아가는 전문직, 자영업자 중산층”이라고 말한다. 식이장애 환자들 중 일부는 자살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런 장애는 대개 부모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쌓느라, 돈을 버느라 바빠 안정적인 애착(Attachment)관계를 맺지 못한 아이들에게서 나타난다. 이들 중 일부는 성장과정에서 정서적 문제를 나타내 ‘문제아’로 자라나지만 그 중 일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어 지나치게 부모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청년이 되기도 한다. 착한 아이들은 커서도 ‘명문대 진학’이나 ‘날씬한 몸매’같이 사회적으로 쉽게 인정받는 해법에 몰두하게 되고, 이것이 지나치면 먹고 토하길 반복하는 식이장애, 우울증을 일으킨다. 소득은 행복, 가치감을 늘 보호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정치인과 정책가들이 경제 성장을, 일반 국민이 부의 축적을 최대의 당면 과제로 여기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들은 ‘자동화된 반응’에서 답을 찾는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금이 60~70년대보다 살기 어렵냐고 물으면 다들 아니라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경제 성장, 부의 축적에 대해 그 시절처럼 집착한다”며 “‘돈=문제 해결’이라는 도식은 자동화된 반응”이라고 지적한다. 경제 성장 우선론을 주장하는 정책가나 재테크를 하는 사람들 모두, 당장 먹고 살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경제 성장, 부의 획득을 통해 해소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경제는 심리에, 심리는 경제에 발목 잡히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수출경기 호전, 가계부채 감소에도 불구하고 내수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건 소비자들의 불안 심리 때문”이라며 경제의 문제를 심리로 돌린다. 심리의 문제는 다시 경제로 돌아간다. 다른 경제학자들은 실업률 상승, 경제성장률 저하, 그로 인한 저금리 기조로 미래 소득에 불안을 느끼면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악순환을 만드는 주범은 우리 자신이요, 공범자는 사회지도층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네만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의사 결정을 할 때 어떤 오류가 나타나는가를 분석해 2002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상황이 불확실할 때 사람들 사이에선 불안을 해소하고자, 인과관계가 미약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믿는 ‘미신’이 생겨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따르면 ‘믿음’이 되고, 사회 다수가 이것을 믿으면 ‘진실’이 된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황상민 교수는 같은 과정으로 우리 사회에 경제 성장, 돈에 대한 미신이 생겨났다고 분석한다. 황 교수는 “‘부’라는 것은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상대적 개념이라 지구상의 전 인구, 한국의 전 국민이 모두 만족할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물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경제 행위는 필요하지만 우리는 이미 중세 유럽의 영주들이 누리는 것 이상의 경제, 문화적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 정도의 경제, 사회적 발전 수준에선 추구하는 가치의 중심을 경제에서 인간으로 바꾸어야 오히려 경제,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누릴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의 요지다.

이코노미스트이자 시장분석가인 김일구 랜드마크투신운용 운용본부장의 생각도 비슷하다. 그는 “정권이 정책의 중심을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에 두면서 지난해 환시장에 개입해 수출 기업의 매출, 이익을 높이려고 애썼지만 이것이 결과적으로 국민의 행복을 높였는가는 미지수”라며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는 GDP지표 대신 국민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해 나라 운영에 참고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미국 학자들, “행복지수로 국가 운영하자”

실제로 미국에선 심리학자, 경제학자들이 GDP 즉 국민계정을 대신할 지표로서 ‘국민웰빙계정’을 만들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대니얼 카네만 심리학과 교수와 앨런 크뤼거 경제학과 교수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계량하고 ‘행복 경제학’을 체제화하겠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기 위해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펴야 하는지 연구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란다. 미국 여론조사에 따르면 ‘매우 행복하다’는 미국인 응답자는 50년대 후반을 꼭지점으로 줄곧 낮아지고 있다. 그동안 미국 1인당 GDP는 계속 늘어났다. 올해 1월 일간지 <타임스>는 “행복 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에 바짝 다가서고 있으며 카네만과 크뤼거가 이르면 내년 GDP와 같은 웰빙계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평가했다.

한국에서도 GDP 성장률 대신, 수익률 대신 행복지수 달성이 목표가 된다면 국무회의, 가족회의가 좀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오, 베이비~ 행복에 충실해~.’ 이경숙 기자 nirvana@economy21.co.kr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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