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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상) <이코노미21> 215호(2004년 9월7일자)에 실린 ‘월스트리트에서 본 한국-우울증 걸린 올림픽 꿈나무’란 글은 독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심장부 월스트리트의 사람들 눈에 비친 한국 경제의 참모습을 짚어본 이 글을 두고 열띤 찬반 의견이 이어졌다. MIT 슬론 스쿨 MBA 과정에 몸담고 있는 저자는 지난 글의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킨 <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가제)란 단행본을 곧 내놓는다. <이코노미21>은 저자와 도서출판 원앤원북스의 양해를 얻어 2월25일 출간 예정인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2차례에 걸쳐 <이코노미21> 독자들에게 미리 소개한다. <편집자 주> 무서운 성장세,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도,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기우뚱거린다. 소비자들은 자신감을 잃고 돈을 쟁여두고 있으며, 기업들은 미래를 비관해 몸을 사리며 투자를 꺼리고 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경제지표들은 여전히 훌륭한데, 경제 주체의 마음속은 곪아가고 있다. 자신감 부족, 심리 위축이 경제를 기우뚱거리게 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경제학은 합리적 인간을 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사람은 주어진 정보를 종합한 뒤 합리적으로 판단해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경제적 의사 결정을 내린다. 특히 경제주체들의 심리에 가장 영향력이 큰 정보는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확실하다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보수적이 되고 경제활동을 주저하기 마련이다.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찬 미래 정보 경제는 심리고, 심리는 정보다. 그런데 이 정보가 왜곡돼 있다면? 한국 소비자와 기업의 심리를 위축시킨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정보가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심리를 바로잡으려면 정보를 바로잡아야 한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눈으로 한국 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데서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아시아 지역에 어떤 주식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로 부도상태가 됐다가 금세 회복해서 지금은 연 5% 정도씩 착실히 성장하고 있다. 다시 올지 모르는 금융위기에 대비하느라 금고에는 엄청난 현금을 쟁여두고 있어서, 현금보유액이 세계 모든 기업 가운데 4위다. 다들 은행에서 돈을 빌려다 경영을 하는 와중에, 이 회사는 부도상태 때 외국 은행들에게서 받은 빚을 3년 만에 다 갚고는 무차입 경영 중이다. 지금은 오히려 빌려준 돈이 빌려온 돈보다 훨씬 많아서 채권자 노릇을 한다. 이런 와중에도 이 기업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수출 증가율은 30%에 이르고, 수익성도 매년 좋아지고 있다. 주력 사업은 정보통신, 반도체 등 첨단 성장분야 제품이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브랜드도 매년 몇 개씩 늘어나고 있다. 이 회사는 어디일까?
정답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2004년과 2005년 경제성장률이 5%에 못 미칠 것이라는 경제예측기관들의 전망을 놓고 “한국 경제가 역동성을 잃었다”는 비관론을 펼친다. 연간 경제성장률이 10%에 육박하던 1970~80년대에 견주면 너무 낮다는 얘기다. 그러나 세계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리고 한국 경제의 세계 속에서의 위치가 어디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큰 오해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한국 GDP성장 추세는 정말 눈부셨다. 외환위기를 맞으며 -6.9% 성장했던 98년을 포함해 2003년까지, 한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4.17%였다. 이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아일랜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치다. 경제가 붕괴 상태였던 98년을 빼고 계산하면 6.8%로 아일랜드에 이어 2위로 올라선다. 그럼 앞으로는 어떨까?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한국의 2005년 GDP성장률 예상치는 4.9%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5%를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나라들이 한국보다 높은 GDP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지다. 성장률이 가장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들은 적도기니(16%), 아제르바이잔(14%), 앙골라(11.9%), 이라크(10.3%), 수단(8.3%), 알제리(8.2%), 중국(8.1%), 카자흐스탄(7.9%) 같은 나라들이다. 세계의 어느 경제전문가도 한국을 인구 50만의 아프리카 서부 국가 적도기니, 전쟁의 참화에서 복구 중인 이라크, 1인당 국민소득이 1천달러 남짓인 중국 같은 나라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한국 경제의 정체'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10% 가까운 경제성장률은,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집집마다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고, 어린 여공들이 하루 열대여섯 시간씩 저임금으로 일하면서 저가 덤핑 수출로 경쟁력을 유지하던 시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안타깝지만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그 길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가까운 일본의 경제사를 살펴봐도, 이제부터의 한국 경제는 4~5% 정도의 성장세를 균형감 있게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게 가장 행복한 성장 전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은 50년대 6·25 전쟁을 전후해 패전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한 뒤, 60년대부터 수출을 기반으로 한 빠른 경제 성장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일본이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발을 들여놓고 미국 시장을 잠식해 가던 70∼80년대에도, 경제성장률은 평균 4~5%에 지나지 않았다. 구체적인 각 산업부문으로 들어가보면 한국 경제의 역동성은 더욱 인상적이다. 어떤 의미에선 ‘숲’에 비길 수 있는 경제성장률보다 ‘나무’에 비유할 수 있는 기업들이 더 강한 인상을 준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2003년 현재 반도체 D램, 선박수주량, CDMA방식 휴대폰 단말기 생산량에서 부동의 세계 1위다. 반도체 D램은 삼성전자가 세계 1위, 하이닉스가 25억4800만달러로 4위였다. 선박건조량도 몇 년 전 일본을 제친 뒤 선두자리를 고수 중이다. CDMA 휴대폰 단말기 역시 LG전자, 삼성전자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2003년 모두 77개 품목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2004년 미국 경제잡지 <포춘> 선정 세계 500대 기업에는 삼성전자(54위), 현대자동차(98위) 등 11개사가 이름을 올렸고, 아시아 50대 기업에는 4개사가 포함됐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2004년(11월 말 기준) 한국의 수출성장률은 무려 32.7%다. 한국 경제는 교역 규모도 세계 12위 수준으로, 세계 시장에 유기적으로 통합돼 있다. 인구 100명당 초고속인터넷 가입자수는 21.3명으로 1위, 인구 1천명당 인터넷 사용자수는 603명으로 2위, 인구 100명당 PC 보급대수는 56대로 8위를 기록하는 등 정보화 분야에서도 선두에 서 있다. 높은 성장동력을 잃어버리지 않은 가운데, 경제의 안정성도 IMF 외환위기 이전에 견줘 훨씬 높아졌다. 한국은 이미 갚을 빚보다 받을 빚이 훨씬 많다. 세계은행 집계 결과 세계 229개 국가 중 10대 채권국에 속할 정도다. 금융위기를 몰고 왔던 외환보유고 부족 문제도 이미 해결한 지 오래다. 2004년 5월 현재 외환보유고는 1665억달러로, 세계 4위 수준이다.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성장성과 안정성 세계 4위의 외환보유고, 10대 채권국이면서 동시에 연 5%의 경제성장률과 연 30%의 수출성장률.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빠른 성장세와 높은 재무적 안정성은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기업 마이크로소프트를 떠올리게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장 스티브 발머가 MIT MBA 과정을 찾아와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 성장 초기부터 기술자 빌 게이츠와 손잡고 경영을 맡아 지금까지 회사를 키운 사람이다. 그 자리에서 발머는 빌 게이츠 회장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성장 초기 빌 게이츠는 항상 노란 장부책을 들고 다니면서 직접 현금을 관리했다. ‘어떤 위험한 일이 닥쳐도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는 사태는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덕분에 금고 안은 항상 몇 달치 월급이 가득했다.” 그러던 마이크로소프트는 고속성장세를 이어가 세계 최대 기업 대열에 자리 잡았다. 대주주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 부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는 세계 최고 기업으로 자라나면서도 이런 보수적 재무관리 스타일을 버리지 않았다. 덕분에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현금을 많이 보유한 기업 가운데 하나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국 경제를 보면,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정말 무서운 기업이다. 아시아 전체에 닥쳐온 외환위기를 장롱 속의 금을 팔아가며 극복해 냈다. 그리고는 위기에 대비한다며 금고에 현금을 쟁여놓아 외환보유고가 엄청난 수준이다. 해외에서는 점점 더 많은 물건을 팔아대고 있다. 20세기 초 식민지 수탈 경험, 중반의 분단과 전쟁 경험, 민주주의 단절과 독재의 경험, 혁명적 민주화 과정, 경제위기로 국가 부도사태에 빠진 경험, 이 모든 경험을 맨손으로 극복하고 나서도 강인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콧대 높은 다국적 기업들과 맞서 싸우는 무서운 아이다. 스스로 부인하고 포기하지 않는 한, 한국 경제의 역동성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보스턴 = 이원재/ MIT슬론 스쿨 MBA 과정 lasttime@freechal.com (이원재는 <한겨레>와 <이코노미21>에서 6년간 경제기사를 쓰다가 2003년 9월부터 미국 MIT 슬론스쿨 MBA 학위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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