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09 20:49
수정 : 2006.07.09 20:49
우리은행 ‘하이테크론’ 담보 없어도 기술 평가로
145개 기업에 900억 대출 “수익보다 중기 살려야”
올해 초 무공해 건강식품업체인 바이오벤처기업 ㈜휴먼엘시에스코리아(사장 전은자)는 운명의 전환점을 맞았다. 2003년 설립한 뒤 매년 적자만 보다가 처음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아 대형 할인매장의 주문을 받은 것이다. 문제는 장어 가공식품 7t을 납품해야 하는데, 원료 구입비가 없다는 점이었다. 자본잠식 상태에다 매출도 변변찮은 중소기업에게 돈을 빌려줄 곳은 없었다. 회사의 성장가능성을 담은 400쪽이 넘는 자료를 들고 ㄱ은행, ㅇ은행을 찾았지만 문턱에서 “담보 있느냐”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회사 대표의 아파트는 회사설립 초기 대출담보로 들어간지 오래였다. 정부가 유망 중소기업을 위해 만든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는 방법도 있지만, 지난해 3월 기금의 보증을 받아 이미 2억8천만원을 대출받은 터라 보증 여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중소기업에 정책자금을 빌려준다는 산업자원부 등 정부부처를 포함한 10여곳의 홈페이지를 매일 뒤졌지만, 모두 재무제표와 담보를 요구했다.
“3년 고생이 물거품이 되는구나”라며 좌절하던 전 사장에게 지난 4월 우리은행으로부터 희망의 빛이 비쳤다. 기술 하나만 믿고 중소기업에게 과감히 신용대출을 해주는 ‘하이테크론’이라는 대출상품이 나온 것이다. 은행 지정기관에서 발급한 기술평가서(BB등급)를 제출해 3억원의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장어 납품을 성공리에 마쳤고 지난달에는 10t의 추가주문까지 받았다. 앞으로 일본 수출까지 계획하고 있다.
우리은행이 기술력 있는 우량 중소기업에게 신용으로만 돈을 빌려주는 ‘새 실험’을 시작한 지 6개월만에 145개 기업들이 900여억원을 대출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은행들의 오랜 담보대출 관행을 깨고, 자금난에 시달리는 유망 중소기업들을 살림으로써 한국경제에 청량제 구실을 할지 주목된다. 하이테크론 실적은 한개 기업당 평균 6억~7억원 수준에 그치지만, 해당 중소기업들에게는 생명수와 같은 귀한 돈이다.
우리은행이 다른 은행들의 회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신용대출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담보 잡고 돈 빌려주는 일은 전당포도 하는데 은행이 언제까지나 이럴 수는 없지 않느냐”는 황영기 행장의 특명 때문이었다. 황 행장은 신용대출 여부를 결정하는 은행 심사역들에게 면책특권을 주는 특단을 내렸다. 대신 기술력있는 유망 중소기업을 제대로 선별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에 주력하도록 했다. 기술평가서라는 종이 한 장만 보고 돈을 빌려주는 상품인 만큼, 정밀하고 세심한 설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중소기업의 기술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국내 기술인증기관 46개 가운데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특허청 등 21개의 인증기관을 선정했다. 해당 기술의 사업성을 살피는 기술평가도 관건이었다. 2000년 벤처 바람이 불 때 많은 은행들이 기술담보대출을 했지만, 기술의 사업성 평가가 이뤄지지 않아 실패의 쓴맛을 봤기 때문이다. 오랜 실사 끝에 기술보증기금을 평가기관으로 정했다. 6개월 동안의 치밀한 준비 끝에 하이테크론 상품을 내놓았다.
우리은행 중소기업전략팀 이동연 부장은 “회사의 기술, 미래가치를 보고 대출을 해줄 때 회사도 크고 은행도 성장한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앞으로 3년 동안 하이테크론으로 1조원 정도를 중소기업에게 대출해 줄 계획이다. 일반적으로 은행들은 1조원을 굴렸을 때 비용을 빼고 최소 3%(300억원) 정도의 수익을 올리는 것을 기준으로 삼지만, 하이테크론은 30분의 1인 0.11%(11억원)로 낮춰 잡았다. 이 부장은 “하이테크론은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은행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실험”이라며 “다른 은행이 요청한다면 관련 노하우를 전부 전수해 주겠다”고 말했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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