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9.19 08:23
수정 : 2006.09.1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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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사본 안주기 일쑤…은행, 무늬만 선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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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깐깐한 성격의 직장인 김아무개씨는 지난 7월 은행 창구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대출계약서(여신거래약정서)를 작성한 뒤 당연히 “계약서 사본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담당 은행원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마지못해 건네주는 사본도 본인 서명만 들어있을 뿐 상환방식 등이 공란으로 남아 있는 ‘불완전 계약서’였다. 김씨는 어처구니가 없어 따졌고, 이틀 뒤에야 제대로 된 사본을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었다.
금융 국제화와 동북아 금융허브 등을 외치는 은행들이 정작 대출상품 등을 팔면서 고객들에게 계약서 사본조차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게 현실이다. 고객들이 따로 사본을 요구하지 않으면, 금리와 만기일 등 기본적인 사항만 적힌 대출통장만 주는 일이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다. 특히 마이너스 통장을 연장할 때 작성하는 여신거래추가약정서의 경우 ‘조건 바뀐 게 없다’는 이유로 고객 대부분이 사본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은행이 보험상품을 파는 방카슈랑스도 마찬가지다. 30대 후반의 자영업자 박아무개씨는 지난해 8월 주거래은행 창구 직원의 권고에 따라 10년짜리 보험상품에 가입했다. 문제는 박씨가 상품이름도 모른 채 가입했을 뿐 아니라 청약서 부본조차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금통장에서 10만원씩 돈이 빠져나가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박씨는 “은행에만 가면 왠지 주눅이 들고 은행이 설마 고객을 속이진 않을 것이란 생각에 그냥 가입했다”고 말했다. 이런 ‘불완전 판매’는 대출 고객들을 상대로 보험상품을 끼워파는 경우 더 자주 벌어진다.
계약을 맺을 때는 양쪽 당사자가 같은 내용의 계약서를 각각 나줘 갖는 것이 기본이다. 계약의 세세한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만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출 계약서 사본에는 금리와 만기일 등 기본적인 계약사항 외에 중도상환수수료, 근저당권설정액(채권최고액), 근저당권 설정비 부담 등 대출통장에는 없는 여러 유의사항이 적혀 있다. 이자 연체시 연체이자율 적용방법도 고객한테 꼭 필요한 정보다. 혹시 금리와 만기일 등 중요 사항이 자필로 작성된 것이 아니면 계약 자체의 효력을 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보험 계약에 있어서도 청약서 사본 전달은 자필 서명, 약관 전달과 함께 보험업계에선 ‘3대 기본 사항’이다. 청약을 철회할 수 있는 기간이 본래 계약체결 뒤 15일 이내지만, 3가지 기본사항 중 하나라도 어기면 철회기간은 3개월로 늘어난다. 금호생명 관계자는 “보험 가입 과정에서 전산입력 오류나 지연 등의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청약서 부본을 꼭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권에 이런 관행이 남아 있는 것은 은행이 고객들한테는 여전히 ‘상전’이라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출 약관은 어려운 말로 가득한데 은행 창구에서 일일이 읽어볼 시간도 없고 친절한 설명을 요구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은행원이 서명할 곳을 연필로 표시한 계약서 원본에 자기 이름만 쓰고 되돌려주기 일쑤이다. 이러니 계약서 사본을 따로 요구하기 보다는 은행이 주는 대출통장만으로 만족하는 고객이 많다. 한 은행의 대출업무 관계자는 “대출고객에게 약정서 사본 수령서명을 받도록 규정화하고 있으나 일부 창구에서 서명만 받고 빼먹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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