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버스를 탔는데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서 청취자 사연이 소개되고 있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용돈을 타내기 위해 회사 상사의 생일을 핑계로 아내한테 상품권을 보내달라고 아슬아슬하게 거짓말을 하며 실랑이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뭐, 승진은 그렇다치고 직장생활이 순탄하려면 직장상사의 생일을 챙기는 거 쯤이야 한국 직장생활 분위기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다만, 그 청취자는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걸 이용했던 거다. 아내한테 10만원짜리 상품권 3장을 받아 회사동료에게 장당 87,000원에 팔고, 만약에 대비하느라 회사 상사에게 생일선물로 5만원권을 건네줬단다.
작년 언젠가는 TV에서 어떤 부부가 아침 방송에 출연한 걸 본 적이 있는데, 남편이 아내 몰래 비상금을 숨겨놨는데 아내가 계속 찾아내더란다. 처음엔 말그대로 돈을 숨기기 위해 감춰 놓았는데, 나중엔 아내가 돈을 찾아내나 못찾아내다 그게 궁금하더란다. 그래서, 계속 숨바꼭질을 했었다나. 사람들은 웃고 난리가 났었지만 난 삶의 삭막함이 느껴져 서글펐었다.
이런 사연들은 라디오를 틀고, TV를 틀거나 결혼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자주 접하는 얘기다. 재미있다고 웃어넘기기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내는 살림, 남편은 밥벌이’ 이런 역할 놀이에 충실한 부부일수록 이런 현상이 보인다.
통장으로 지급되는 월급을 몽땅 아내한테 넘겨주고 아내가 주는 용돈 찍소리 못하고 받아서 생활하는 게 많은 한국 남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아내가 살림만 하든, 아내도 직장생활을 하든 웬만한 한국의 가정에서는 아내가 돈 관리를 하는 것 같다. 한 가정의 돈을 한 사람이 관리한다는 거 여기서부터 이미 그런 상황을 각오했어야 했다.
내 상식으로는 부부가 자기 문화생활을 위해 자기 의지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개인 통장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가령, 월급이 지급되면 남편과 아내가 머리를 맞대고 저축 얼마, 생활비 얼마, 문화 생활비 얼마, 남편과 아내 용돈 각각 얼마 이런 식으로 배정을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남편에게 교통비, 담배값, 점심값 이런 기본적인 명목에 해당하는 돈은 할당이 된다. 단지, 딱 맞게 여유없이 주어지니까 그런 잔머리를 쓸 수밖에. 월급만 가져다 주면 가정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남자와 살림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여자가 만나면 저런 배정 작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용돈을 더 타내려는 잔머리는 그 사람의 어린 시절 엄마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결혼을 한 지금은 그 엄마가 아내로 바뀌었을 뿐이다. 필요한 걸 손에 넣기 위해 엄마한테 잔머리 굴리던 습관이 결혼을 해서도 아내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 뿐이다. 책 산다고 돈 달래서 여자 친구랑 놀러다니고, 술 마시던 모습이 직장 생활버젼으로 바뀐 것 분이다.
용돈에 대한 개념을 심어주지 않는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한국인의 경제관념이 보인다.
일주일, 한달 이런 단위로 주어지는 용돈으로 아이가 손안에 주어진 금액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예산을 짜고 실천에 옮겨보는 경험을 해보면 어린 아이때부터 경제개념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다. 그런 경험을 통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자립심도 키우고, 돈에 대한 개념을 키울 수 있다. 그런데, 한국 부모들은 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고, 아이가 사 달라고 할 때마다 이건 비싸서 안 돼, 저건 금방 고장나서 안 돼, 애들이 저런 게 왜 필요하냐고 안 돼 이런 식이다 보니 애들은 애들대로 불만, 부모는 부모대로 불만만 쌓인다. 아이가 동네 수퍼나 남의 집에서 물건을 훔치고, 같은 학생들의 돈을 빼앗는 행위를 왜 할까?
물론, 아내는 아내대로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다. ‘애들 교육비, 집장만, 기저귀값, 분유값, 세금, 보험... 이런 것들 다 충당하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한국 사람들 유난히 의, 식, 주에 대한 애착(집착?)이 강하다. 먹고, 입고, 사는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기본이 되어야 할 거에 평생 목숨을 거는 건 생존하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다. 아내와 남편의 용돈 전쟁은 생존이 불안하다는 데에서 답이 나온다. 돈을 은행에 쌓아두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불안’이라는 코드가 자리잡고 있는 거다. 물론, 여기엔 그지같은 사회적 인프라가 한몫 단단히 하겠지만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데 목숨 건다. 하지만, “왜? 많이 버는가?”라고 물어보면 답이 뻔하다. 비싼 차 굴리고, 삐까뻔쩍한 집에 살며 소위 말하는 명품을 입기 위해서다. 한국 사람들 머리엔 ‘행복=돈’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다고 보아도 될 지경이다. 한국 사람들의 ‘돈벌이’엔 창의적인 이유! 이게 빠져있다. 한국 사람들의 경제관념은 ‘결핍/열등감에 대한 보상, 속물근성의 발로, 생존에 대한 불안’ 이런 게 좌우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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