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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재테크=죄테크’의 종말 |
재테크는 직역하면 ‘돈버는 기술’이란 말이다. 그러면 재테크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재테크는 ‘선’인가 ‘악’인가? 재테크는 ‘지혜’인가 ‘무지’인가? 그리고 이런 질문들은 성립하는가? 그 답은 있는가?
내 집 마련이란 슬로건 아래 부동산투자(투기)는 주식투자와 함께 재테크의 유용한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내 집 마련이란 것은 삶의 본거지를 확보한다는 ‘정당성’과 차액을 노린다는 ‘투기성’을 양면성을 지닌 채 비난이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재테크로 여겨져 왔다. 아무리 그것이 정당성을 지녔지만 오랜 세월 갚아야하는 막대한 빚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박임에 틀림없다.
순전히 투기성 부동산 구입이라도 집이 없는 사람은 당당하게 내 집 마련이라는 정당성을 내세움으로써 인간이 ‘삶의 터전’이 되는 ‘집값’을 올려놓는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면 부동산을 둘러싼 금융권의 행위는 어떠했는가? 대출이자를 노린 무책임한 대출이 화를 불렀다. 10여 년 전의 일본이 부동산거품이 꺼지면서 잃어버린 10년을 자초했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한 수많은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수는 한 해 3만 명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다. 부동산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은행의 유혹에 넘어간 수많은 ‘죄 없는’ 기업인들, 개인들이 거품경제의 희생양이 되었다. 부동산 가격은 3분의 1로 곤두박질쳤고 임대료는 빚도 못 갚을 수준으로 떨어졌다. 은행권의 권유는 헛된 망상이요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개인, 중소기업뿐만 아니었다. 마구잡이식 다각화에 주력했던 대기업이 매수당했다. 굴지의 기업인 닛산자동차가 그러했다. 닛산이라는 브랜드는 르노닛산으로 바뀌었다.
거품의 독성은 아주 강한 것이었다. ‘돈버는 기술’ 즉 ‘재테크’는 번 사람에게는 일확천금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일본은 그 거품경제의 뒷 처리를 하는데 10년이라는 세월을 낭비해야했다. 일본인들은 결코 그 교훈을 잊지 않았다. 경기회복의 기대와 함께 최근 2년 동안 ‘미니거품’이 일기는 했지만, 제한적인 것에 불과했다. 내실을 단단히 한 결과 일본은 이번 미국의 ‘큰 사고-모지기론 붕괴’의 직격탄은 맞지 않았다. 엔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다.
이번엔 미국의 거품이 꺼졌다.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의 국가 브랜드이미지가 큰 손상을 입었다. 미국의 말과 행동이 의심을 받게 되었다. 모범생에서 문제아로 전락했다. 서브프라임 즉 ‘비우량담보채권’은 그 말뜻 자체에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많은 채무자들이 은행의 무책임한 유혹에 농락당했다. 그 처리는 미 정부의 몫이 되었고 결국 세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재테크’는 ‘죄테크’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엄청난 돈을 빌려서 평생 갚아가는 것은 정상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일본도 그랬다. 20대나 30대 초반의 젊은이에게 36년이란 세월은 론을 갚기에 충분한 시간이고 정년 때까지 일이 보장될 것이라는 달콤한 가정 하에 론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품경제의 붕괴와 함께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10년간의 고통’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미국이 거품은 일본보다 글로벌경제에 미치는 영향 면에서 그리고 복잡성면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 MBA를 딴 젊고 철없는 애숭이들의 노름 아니 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다.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재테크를 ‘선’이라고 여기고 허무한 기대심리에 젖어 투기에 참가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한국’, ‘중국’ 중 어디인가? 한국의 거품은 시한폭탄이다. 폭발하면 국가가 파산할 지도 모른다.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나 미국만큼 큰 나라도 아니다. 경제기반도 약하다. 기술경쟁력도 약하다. 꺼진다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오랜 시간의 고통을 요구할 이 시한폭탄은 누가 만들었는가? ‘선’으로 여겨진 재테크는 ‘악’으로 판명이 날 것인가?
경제는 제로섬게임이고 따는 사람이 있으면 잃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선으로 여겨진 부동산재테크는 모두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인데 모두가 이기려고 했고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졌다. 내가 이기면 누군가가 잃고 고통을 받게 마련이다. 그 고통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고 그 고통의 주인은 자기가 아닐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거품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경기를 살리려 애쓸 것이지만, 아파트는 넘쳐나고 토목건설의 대상도 많지 않다. 이미 충분히 국토가 콘크리트로 덮여있다. 뉴딜정책을 펼 무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재테크’는 ‘죄테크’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거품의 크기만큼이나 고통도 크고 고통의 시간도 길다. 지금 부동산거품은 2/3에 달한다. 더 클지도 모른다.
‘성공’의 정의와 ‘잘산다는 것’의 정의를 새롭게 내려야 한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권력을 쥔 그룹은 과거의 방식에 의한 과거의 성공을 재현하려 애씀으로써 파탄의 수렁을 더 깊이 파고 있다. 다른 방법과 방식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 정책을 펴고 있다. ‘죄’를 기초로 교회가 섰고 죄를 기초로 한 성공은 ‘은혜’로 치부되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성공을 은혜로 여긴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죄의 연쇄로 빚어진 ‘산물’일 뿐이다. 그렇게 쌓은 ‘부’는 ‘권력’을 손에 넣었다.
대한민국은 많은 경우 죄와 은혜를 분간하지 못하는 종교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 그들이 ‘법치’를 입에 올리고 ‘질서’를 외친다. 법에 의해 심판받아야할 자들이 ‘법과 질서’를 내세우고 역사를 돌려놓으려 하고 있다.
‘재테크’는 과거에 성공을 가져다준 듯하지만 실상은 국가와 사회를 병들게 만든 ‘죄테크’였다. 국민들은 ‘부동산투기’라는 죄테크로 사회의 리더라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내세운 비자금조성과 부의 세습이라는 엄청난 죄테크에 미쳤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는 크고 강한 것이 진리요 정의라는 인식이 철학이 되었다. 희생은 어리석은 것이며 나누는 것은 바보나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논리가 타당성 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돈’만이 정의요 법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교양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이 되었다. 정치가, 교수, 종교인이 돈을 매개로 그들의 사업을 확장하고 기득권을 형성하고 그것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제 ‘재테크’는 ‘죄테크’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 ‘시한폭탄’인 ‘부동산 거품’의 붕괴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말인가? 크고 강한 것이 아름답다는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부동산 거품의 붕괴를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 시한폭탄의 카운트다운을 지연시킬 방법은 있는가? 계속적인 외화벌이가 그것인가? 붕괴를 막기 위해 더 큰 거품을 만들 수밖에 없는가?
묘안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의 빛바랜 성공에 집착할 뿐이다.
‘죄테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그 종말 후의 세계를 어떻게 만들지를 곰곰이 생각해야하지 않겠는가? ‘시한폭탄’ 카운트다운을 지연시키는 것은 아무 해결책도 되지 않는다. 거품을 서서히 터뜨릴 능력이 현 정부에게 있는가? 신뢰와 구심점을 잃은 이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미국 발 ‘거품의 붕괴’에서 어떤 교훈을 찾고 우리의 ‘거품’이 거친 후에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를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때다. 거품은 반드시 터지게 마련이다. 터지지 않으면 후손들의 부담이 너무 크다. 곪은 상처는 터트리고 가되, 그 후의 조치를 잘 해야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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