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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돈이 생산적인 곳으로 흐르려면 |
은행 돈이 생산적인 기업 활동에는 별로 쓰이지 않고 비생산적인 가계 부문에만 치우쳐 걱정이다. 예금은행의 가계대출은 지난 6월 말 현재 293조3천777억원으로 기업대출 287조6천445억원보다 5조7천여억원이 많았다. IMF 사태 직전인 1996년에는 기업대출이 가계대출의 2.5배에 육박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잔액 기준으로는 이번에 처음 가계대출이 기업대출을 추월했지만 순증액 기준으로는 IMF 사태 이후 거의 매년 가계대출이 기업대출을 웃돌아 지난해에 4.5배, 올 상반기에는 2.8배를 각각 기록했다.
가계대출과 기업대출이 역전된 이유는 간단하다. 기업은 투자 수요가 크게 위축돼 돈 쓸 일이 별로 없는 반면 가계는 지난 몇 년 동안 부동산 투기와 과소비 등으로 자금 수요가 급증한 탓이다. 기업들이 문어발식 확장에 열을 올리던 시절에는 만성적인 초과 자금 수요 상태가 빚어졌고 심지어 은행 돈을 많이 끌어다 쓸수록 `유능한' 기업으로 통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되레 여윳돈이 남아돌아 기존의 은행 빚을 갚아 나가는 형편이라니 격세지감마저 든다.
기업의 운전.시설자금 수요 격감으로 마땅히 돈을 굴릴 데가 없는 터에 떼일 염려가 적어 자산 건전성 확보에도 유리한 가계대출을 은행이 마다할 리가 없다. 은행도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인 이상 안전한 수익원을 쫓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게다가 은행들은 내년부터 적용되는 신 BIS 기준 때문에 자산 건전성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고 설비를 늘려 이윤을 창출해 세금을 내고 종업원들에게 소득원을 제공하는 자금의 생산적 선순환은 은행 돈이 기업에 흘러들 때에만 가능하다. 요즘처럼 돈이 부동산 쪽에 쏠리면 집값과 땅값을 올려 기업 활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서민들의 소박한 `내집 마련' 꿈에 찬물을 끼얹는 등 폐해만 잔뜩 키울 뿐이다. 금융 감독 당국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은행들에 주택담보대출 자제를 촉구하는 `창구지도'에 나섰으나 토종은행과 외국계 은행들이 소매금융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하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기업들이 좀체 투자에 나서지 않으려는 분위기여서 앞으로도 가계대출 우위 현상이 당분간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투자 부진은 장기 불황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금 사정에 여유가 있다는 대기업은 그렇다 쳐도 조금만 도와 주면 얼마든지 살아날 유망 중소기업들을 은행들이 외면해서는 안된다. 위험도에 따른 금리 차등을 인정하는 등 은행들의 운신의 폭을 넓혀 주는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업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불확실성을 제거해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만이 은행 돈의 건전한 흐름을 담보할 확실한 대안임을 명심해야 한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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