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26 20:03
수정 : 2014.01.26 22:22
정부, 전액 배상한다지만
정보 접근성 떨어지는 고객이
직접 피해입증해야…‘산 넘어 산’
“1명이 소송 제기해 승소하면
나머지 피해자들에도 적용을”
서울에서 사는 김성한(가명·38살)씨는 며칠 전 지방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개인정보 유출 여부를 엔에이치(NH)카드 누리집에서 확인했다. 그의 아버지는 5년 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 퇴임한 후 2년 전부터 한 대기업 협력사에서 용접일을 하고 있다.
김씨는 “아버지는 신용카드를 안 쓰시던 분인데 새로 취직한 회사에서 월급통장을 만들어주면서 카드도 만들어 준 모양”이라며 “카드사들은 피해를 전액 배상해준다고 하지만 평생 컴퓨터는 커녕 이메일도 안 쓰시는 어르신들이 피해를 입증하실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1억400만건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케이비(KB)·엔에이치·롯데 등 3개 신용카드사는 물론 정부도 정보 유출에 따른 피해를 전액 배상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제 고객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배상받기는 매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연령·학력·지역 등의 이유로 금융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관련 금융·법률 지식이 얕은 금융소비자 계층은 피해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배상을 요구하기 어렵다.
한 시중은행에서 소비자 보호 영역에서 근무하는 한 간부는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법에 정해져 있는 권리도 이용하지 못하는 계층이 상당수 있다”며 “피해를 입었을 땐 해당 고객이 적극적인 배상 요구를 해야 하지만 이런 계층은 사실상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근본적으로 배상을 위한 피해 입증의 책임이 금융회사가 아닌 피해자인 고객에게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최용호 금융위 서민금융과장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와 카드사의 정보 유출 간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아직까지 회사가 과실과 피해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도록 한 입법례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최 과장은 “정부는 피해자의 피해 입증에 도움이 되는 모든 정보를 카드사들이 제공하도록 독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배상을 받기 위해선 피해자가 입증해야 하고, 입증 정보도 카드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배상받기가 산 넘어 산인 셈이다.
이같은 역전된 입증 책임 부담 외에도 실제 소비자들이 적극적으로 피해 입증을 하며 금융회사에 배상을 요구할 유인도 적다. 정보 유출 피해가 대체로 ‘소액 다수’의 양상을 갖기 때문이다. 개별 고객이 적은 손해액을 배상받기 위해 복잡한 입증 과정과 소송 절차를 무릅쓸 여지가 적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주도하는 각종 ‘단체 소송’에 피해자 참여율이 낮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성진 변호사(참여연대 시민경제위원회 부위원장·법무법인 한결)는 “소액 다수 피해를 배상받기 위해선 무엇보다 집단소송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한 명이 대표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 나머지 피해자들도 함께 소송의 결과를 적용받도록 하는 제도다. 다만 김 변호사는 “집단소송제와 함께 거론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금융회사의 고의·중과실을 피해자가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며 “별도의 입증 과정 없이 유출 건당 일정액을 배상해주는 ‘명목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정의 등 시민단체들은 27일 오전 서울 종로 케이비카드 본사 앞에서 집단소송제 도입 등을 요구하는 ‘신용카드 불매·절단 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한편 개인정보를 유출한 3개 신용카드사들은 유출 내역을 피해자에 알리는 과정에서 피해구제 조처를 누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에선 정보 유출 통지문에 피해자들의 대응조처와 구제절차를 반드시 알리도록 하고 있다. 민주당 ‘신용정보 대량유출 대책특위’ 위원장인 강기정 의원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피해 구제절차 통보누락은 금융회사 개인 판단이 아니라 정부 당국의 의도적 지시에 의해서 빠진 것 아니냐 하는 의혹이 있다. 누락된 필수사항은 고객에게 재통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경락 송호진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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