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16 20:32
수정 : 2014.02.16 21:30
명목금리가 제자리에 있어도
물가 하락땐 실질금리 상승
수요 위축·실질 부채부담 커져
물가목표치 상향조정 압력등
통화정책 패러다임 변화 촉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위기의 원인에 대한 반성, 기존의 성장전략에 대한 재검토, 위기 대응정책 등의 여러 영역에서 변화가 진행되어 왔는데, 정책적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통화정책에서 발견된다. 중앙은행이 물가안정 뿐만 아니라 자산가격 안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거나, 나아가 금융안정을 위한 거시건전성 감독의 수행 주체와 방식 등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통화정책의 범위가 확장되는 측면도 있지만, 물가안정이라는 ‘전통적’ 영역에서도 양적완화로 대표되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이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기침체는 저축에 비해 투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목표는 저축과 투자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시장금리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며, 현행 물가안정목표제 하에서 중앙은행은 기준금리(정책금리) 조정을 통해 정책목표 달성을 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금융위기 직후 위기의 심각성으로 인해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낮추다보니 거의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시장에서 관찰되는 명목금리는 정의상 제로 이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 자금을 빌려주면 오히려 이자를 지급해야 하므로 차라리 그냥 현금을 보유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명목금리의 제로 하한’이라고 하는데, 경기침체기에 통화정책의 어려움은 여기서 비롯된다.
저축과 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명목금리 그 자체가 아니라,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또는 그 기대치)을 뺀 실질금리다. 디플레이션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명목금리가 제자리에 있어도 물가가 하락하면 실질금리는 도리어 상승하기 때문이다. 경기침체 하에서 실질금리의 상승은 수요 위축을 더욱 심화시키고 실질 부채부담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경기침체로 명목금리가 제로 하한에 도달한 상황에서, 수요 회복을 위해 실질금리가 하락하려면 인플레이션 기대가 높아져야 한다. 양적완화 정책의 핵심적 의의는 바로 이 대목이다. 국채와 주택채권(MBS) 등을 대규모로 매입하는 미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정책은 기준금리를 더 이상 인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직접 장기금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대규모의 통화 팽창을 통해 사람들의 인플레이션 기대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다.
관련된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명목금리가 제로 하한에 도달한 상황에서 통화정책이 인플레이션 기대의 상승을 통해 실질금리 하락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경기회복 이후에도 팽창적 통화정책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이 결정적이다. 즉 사람들의 기대를 변화시키고, 이러한 변화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는 물가안정을 기본 책무로 하는 중앙은행에게 딜레마를 야기한다. 팽창적 통화정책이 효과가 있으려면 중앙은행이 ‘무책임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어야 한다’(credibly promise to be irresponsible)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딜레마를 지칭한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가 바로 지난해부터 미 연준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선제 지침’(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이다. 즉 통화정책의 지속성에 대한 신뢰 확보를 위해 실업률과 물가가 특정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현재의 정책기조를 유지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부 연구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아예 중앙은행의 물가 목표치를 상향 조정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 연준의 암묵적인 물가 목표치는 2% 수준인데, 이를 명시적으로 3% 또는 4%로 상향 조정하면 인플레이션 기대의 확산을 통해 경기회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기침체기의 임시방편에 그치지 않고, 평상시에도 물가 목표치를 현재보다 높은 수준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평소에 물가와 금리를 보다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으면, 위기 발생시 제로금리 하한에 대한 걱정 없이 금리인하를 통해 대응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크며, 따라서 통화정책의 운신 폭도 더욱 넓어진다는 것이다.
위기 이후 경제 및 금융환경의 변화는 물가안정에 대한 통화정책의 패러다임 변화를 촉발하고 있다. 현재 30여개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물가안정목표제는 1990년 전후의 고물가 시기에 도입된 이후 물가안정과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 축적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최근 주요국의 장기 저성장 가능성이 부각되는 등 과거와 달리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고령화와 잠재성장률의 하락 등으로 저성장과 저금리 기조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다. 현재 우리의 물가안정목표 범위는 2.5~3.5%로 주요국들과 비교하면 낮지 않은 수준이지만, 국내외 환경변화 등을 감안하여 기존의 통화정책 체계에 대한 고민과 재검토가 필요해지고 있다.
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분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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