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1.03 20:34
수정 : 2014.11.04 08:54
7월 박 대통령 ‘보신주의’ 질책 뒤
금융위, 은행들에 대출 강력 독려
절반 이상은 기존 거래기업 대출
기술력 낮은 기업 비중도 39%나
‘실적 내기 위주’ 정책에 우려 목소리
가전업체 모뉴엘의 3조2000억원대 위장수출 사기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최근 정부가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는 기술금융(기술신용대출)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7월에 2000억원 수준이던 기술신용대출 잔액이 10월 기준으로 2조원대를 넘길 것으로 관측되면서, 정부의 과도한 실적 챙기기 탓에 제대로 된 심사 없이 성급한 대출이 이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3일 은행연합회의 ‘기술금융 종합상황판’ 자료를 보면, 은행권의 기술신용대출 실적은 7월말 486건 1922억원에서 8월말에는 1510건 7221억원으로 증가했다. 이어 9월말에는 3187건으로 기술신용대출이 늘어나 대출잔액이 1조8334억원에 달했다. 은행별로 보면 기업은행이 6920억원(1337건)으로 가장 많았고, 우리은행(2855억원·425건), 하나은행(2824억원·333건), 신한은행(1778억원·334건) 등의 차례였다. 10월말 실적은 2조원대 후반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금융은 박근혜 대통령이 7월 ‘금융기관 보신주의’를 강하게 질책한 이후 금융위원회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온 정책 과제다. 기술신용평가기관(TCB)으로 지정된 기술보증기금과 한국기업데이터, 나이스평가정보 등 3곳이 산출한 기술신용등급을 기반으로 은행들이 대출을 해주는 방식이다. 금융위는 지난달부터 은행연합회에 은행별 기술금융 실적을 공시하도록 해 은행간 경쟁을 부추기는가 하면, 기술금융 실적에 비중을 두는 혁신성 지표를 새로운 은행 평가 요소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가파르게 늘어난 은행들의 중소기업 대출은 모뉴엘의 대출사기를 계기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모뉴엘은 홈시어터 피시(PC) 케이스의 수출가격을 부풀리거나 서류를 조작해서 수출을 한 것처럼 꾸며서 6년간 10여개 은행에서 3조2000억원의 대출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은행들이 무역보험공사의 보증 서류만 믿고 부실 대출을 해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면서, 불과 두세달 만에 급증한 기술금융에 대한 여신심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김용범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은 “모뉴엘과 기술금융은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해당 기업의 기술 역량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서 대출을 해주자는 게 기술금융의 취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모뉴엘 같은 기업을 걸러낼 수 있다”며 “정부 정책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는 신한·하나은행 등에서도 실적이 늘어난 것은 은행 스스로도 중소기업 대출을 새로운 수익원으로 삼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권 안팎에선 정부가 ‘실적 쌓기’ 위주로 기술금융에 가속도를 내고 있는 데 대한 우려가 적잖게 나온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은 기업당 금액이 크지 않은데, 불과 몇달 만에 기술금융대출이 2조원 가까이 늘어났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기술기업을 새롭게 발굴해낸 것인지 실적 부풀리기를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올해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지난 7~8월 기술신용평가기관의 평가서를 반영해 실행된 기술금융대출 가운데 56.6%는 기존에 은행들이 거래하던 기업이다. 대출액으로는 전체의 78.4%를 차지한다. 실적 부풀리기식 대출이 주를 이루는 것 아니냐는 의혹은 기업은행의 기술신용대출 현황에서도 엿보인다.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분석에 따르면, 기업은행의 기술금융 대출을 받은 592개 기업(8월말 기준) 가운데 기술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기술등급 T6 이하(T1~T10으로 구분해 우수부터 취약까지 등급을 매김)인 기업이 231개(39%)나 된다. 또 기업은행이 자체 평가한 신용등급이 BB 이상으로 양호한 기업이 531개(89.8%)로, 새로 발굴한 중소기업보다 신용이 좋은 기존 거래 기업이 대부분이었다.
한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담당 부행장은 “아무리 좋은 기술을 보유했다고 해도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 사업을 하면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서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기술신용대출이 급하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 지금 은행들은 기술평가를 할 전문인력을 막 구한 단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정부 쪽에선 성장 가능성이 있는 중소기업까지 묻힐 수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이덕훈 수출입은행장은 지난달 27일 국정감사에서 “모든 대출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중소기업 육성이라는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황보연 송경화 기자
whynot@hani.co.kr
기술금융(기술신용대출)
박근혜 정부가 올해 6월 이후 도입한 정책금융 제도. 기술신용평가기관(TCB)으로 지정된 기술보증기금, 한국기업데이터, 나이스평가정보 등에서 산출한 기술신용등급 평가에 기반해 은행들이 해주는 중소기업 대출 제도다. 기술력은 우수한데 담보가 없어 은행대출을 받지 못하던 기업에 대한 자금 조달이 목적이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