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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비영리, ‘경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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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리뷰]
2008년 겨울, 제3섹터에는 강추위가 몰아치고 있다. 한겨레경제연구소 조사에서, 비영리조직 경영자의 3분의 2가 ‘지금 비영리조직은 위기’라고 응답했다. 회계 스캔들에 휘말려 검찰 수사를 받는 조직이 나오는가 하면, 보수논객들은 ‘비영리조직이 지난 10년간 나라를 망쳤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느 비영리조직 경영자는 “성명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던 시대는 갔다”고 말한다. ‘활동가들만 있는 기자회견장에서 딱딱한 성명서를 읽고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을 뒤지는 활동’의 비애를 털어놓는 운동가도 있었다. 비영리조직에 대한 국민의 신뢰 역시 과거와 견줘 크게 떨어졌다. 각종 조사에서 ‘시민단체’에 대한 ‘시민’의 신뢰는 과거 10년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10년 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1998년 삼성전자 주총장을 떠올려보자. 당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이던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소액주주 자격으로 발언권을 얻은 뒤, 대형 차트를 내보였다. 삼성전자가 유령회사를 통해 삼성자동차에 투자하면서 주주들에게 손실을 끼쳤다는 주장의 근거를 표와 그래프로 조목조목 제시하는 자료였다. 그때까지 논쟁으로 아수라장이던 주총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총회 의장을 맡았던 윤종용 당시 삼성전자 사장도 발언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날, 13시간이 넘는 마라톤 주총 현장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국에 전해졌다. 지금으로 따지면 비영리조직의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앞에 전 국민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다. 대형 로펌과 돈과 충성스런 임직원을 거느린 삼성전자가, 가진 것 없는 비영리조직 참여연대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이었다. 주총 발언을 통한 재벌 개혁이라는, 혁신적인 운동 전략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2000년 12월, 역시 참여연대 소속 윤종훈 회계사는 국세청 건물 앞에 피켓을 들고 섰다. 국세청 쪽은 깜짝 놀랐다. 같은 건물에 외국 공관이 입주해 있어 시위를 할 수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외국 공관 100미터 이내에서는 시위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국세청 앞은 시위금지구역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당연히 이 낯선 장면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참여연대 쪽은 법의 허점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법적으로 ‘시위’란 2인 이상이 함께 하는 것으로, 1인이 하는 행동은 ‘시위’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금지되지도 않는다. 이제는 유명해진 ‘1인 시위’라는 혁신적 마케팅 전략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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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조직 경영성과 창출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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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가장 머리 좋고 깨끗한 사람들이 모여, 성명서 제목이 신문기사 제목에 ‘먹히도록’ 만드는 데 밤을 새웠다. 그렇게 나온 성명서가 비리를 고발하고 정부 정책 방향을 바꾸는 순간, 시민들은 비영리조직에 열광했다. 정부와 기업은 비영리조직의 순발력과 의제 설정감각을 따라 배워야 했다. 그야말로 ‘좋은 시절’이었다. 그렇게 쌓인 공신력은, 자금도 인력도 부족한 비영리조직이 성명서 한 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위로까지 올라설 수 있게 했다. 왜 그 좋은 시절이 사라진 것일까? 비영리조직이 지금 직면한 문제는 무엇일까? 한겨레경제연구소는 그 답을 얻는 여정에 나섰다. 우선 비영리 분야 전문가를 대상으로 연쇄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비영리조직 경영자 11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결론은 ‘경영’이었다. 1998년 이후가 비영리조직에 있어 사회 다양성의 증대 등 외부 환경의 호조건과 첨단 운동 방식이 결합된 고속 성장기였다면, 이제 외부 환경이 정체되는 가운데 경쟁은 심화되고 있는 시기가 됐다. 지금 비영리조직들은 오랜 성장기 속에 형성된 ‘활동적 타성’(active inertia)에 빠져 있다. 성장기의 경로에 의존하느라 새로운 수요에 맞춰 혁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움직이고 있으나 사회 요구를 맞추지 못하는 지금, 바로 ‘경영’이 필요한 때다. 효과적인 성과 창출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핵심 성공요인을 찾기 위해, 전문가와 경영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비영리조직을 찾아가, 그들의 경영 방식을 물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했다. 첫째, 명확한 미션을 설정하고 그에 충실하게 사업을 벌였다. ‘초심’을 잘 잡고 지켰다는 이야기다. 둘째, 주주에게 책임을 지는 기업이나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정부보다 투명성과 책임성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시스템을 개선했다. 셋째, 영리기업이 남부럽지 않을 만큼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기업, 정부 등 우리 사회 다른 부문의 조직과 합리적인 파트너십 관계를 맺고 있었다. 넷째, 조직의 비전뿐 아니라 조직원의 비전도 고려한 인적자원 관리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많은 비영리조직 경영자들은 외부 환경 악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한겨레경제연구소는 비영리조직에 ‘경영’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외부 환경 변화는 언제나 도전이면서 동시에 기회다. 성명서로 세상을 바꾸는 시대가 지나갔다고 해서, 세상을 바꾸는 길이 영영 막힌 것은 아니다. 이제 ‘경영으로 세상 바꾸기’의 방법을 찾아가야 할 때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질문해 본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활동적 타성(active inertia): 경영학자 도널드 설이 저서 <기업혁신의 법칙>에서, 급속한 성장 뒤 조직에 나타나는 부작용을 일컬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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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I가 내다본 2009년 경제경영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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