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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24 15:15 수정 : 2008.12.24 15:15

박상필 성공회대 NGO대학원 연구교수

[헤리리뷰]

국가와 시장이라는 제도에 기초한 근대성은 과학과 진보라는 수레바퀴를 통해 물질문명을 성취하는 역사적 성과를 이루었다. 동시에 억압, 착취, 불평등, 물신화, 환경파괴 등과 같은 문제점도 노정하였다. 비영리조직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하였다.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와 작동원리는 관료제·획일화·다수결 등과 같은 국가의 운영원리나 효율·경쟁·실적주의 등과 같은 시장의 원리와 뚜렷한 차이가 있다.

국가와 시장 바깥의 자발적 결사체인 비영리조직은 시민의 자유로운 참여를 통해 권력과 자본을 견제하고, 공공서비스를 생산하며, 대안사회를 모색한다. 따라서 비영리조직은 국가와 시장과는 다른 목적과 비전을 갖는다. 권력과 화폐에 의한 효율보다는 인간의 구체적 삶이 이루어지는 생활세계의 문화를 중시한다. 계층화된 위계조직보다는 수평화된 네트워크를 선호하고,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을 강조하며, 강제적 힘보다는 참여하는 의사결정을 지향한다. 경쟁보다는 연대를 우선으로 하고, 성과와 함께 과정을 중시하며, 다수결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소수자의 의견도 경청한다.

현대사회에서 비영리조직이 발달하고 활성화된 것은 보다 민주적이고 참여 지향적인 조직원리가 현대인의 다양하고 탈물질적인 가치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물질적 욕구에만 집착하거나, 획일화된 생활방식에 만족하거나, 단조로운 발전을 지향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율과 이니셔티브, 공공적 의사결정 참여, 공동체적 사고와 생활, 친환경 생활, 형제애와 이타주의, 세계시민적 윤리, 문화적 권리와 소수자의 정체성 등은 현대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생활목록들이다. 현대인은 권력과 돈 외에 정체성, 자율성, 공동체, 사랑, 우정, 봉사, 연대, 생태, 영성 등과 같은 가치에도 관심을 가지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는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각종 비영리조직에 의해 충족된다.

지난 20여년간 한국 사회는 급속도로 민주화하고 다원화되면서 시민사회의 여러 비영리조직이 꽃을 피웠다. 그러나 급속한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의식적·이론적·제도적 토대는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 조직은 만들어졌으나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이 비도덕적이었고, 운영은 되고 있으나 민주주의의 원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으며, 활동은 하고 있으나 조직 목적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였다. 비영리조직의 원리와 목적에 대한 학습과 훈련이 허약한 상태에서 하나의 조직이라는 명분과 하나의 직업을 위한 수단으로 지탱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한국의 비영리조직은 폐쇄된 구조 속에서 소수 권력자가 의사를 결정하고, 조직을 사유의 수단으로 바라보며, 위계적 관료화가 고착되었다. 생활세계의 미시적인 권리를 보장하기보다는 출세나 과시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협력과 연대보다는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물론 비영리조직마다 지극히 다양하고, 이런 문제가 한국적인 현상만은 아니며, 한국의 비영리조직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비영리조직 본래의 목적과 비전에 비추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발적 결사체인 비영리조직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어떤 서비스를 생산한다는 사실만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래 지향했던 목적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 달성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복지기관은 독거노인에게 생활필수품을 전달하는 것만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 노인에게 따뜻한 말벗이 되어주고 인간적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시민단체는 정부 비판과 공익 창출을 넘어 조직 운영에서도 민주적인 급진성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비영리조직이 내부 비판에 직면하고 시민적 지지를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은 규모가 취약하거나 성과가 부족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비영리조직의 특수한 미션에서 일탈했기 때문이다. 비영리조직이 스스로 지탱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시장과는 다른 본래의 운영원리와 가치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비영리조직 고유의 가치인 자율적 참여, 봉사적 리더십, 공동체정신 등을 되새겨보고, 민주주의의 중요한 메커니즘인 자치권력, 거버넌스, 사회자본 등을 조직운영에 실질적으로 적용하는 자기혁신이 필요하다.

박상필 성공회대 NGO대학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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