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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옥 대표는 착한 기업이 질 좋은 제품을 들고 나와, 소비자를 설득하며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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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리뷰] HERI가 만난 사람 ‘참 신나는 옷’ 전순옥 대표
오빠 전태일 뜻 이어 노동운동 투신 1970년 서울 청계천.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 법전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온몸에 불을 붙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다. 그때, 그에게는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있었다. 그 동생은 곧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했다. 이 동생은 오빠의 뜻을 이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 운동에 뛰어든다. 그러다 홀연히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다. 그러고는 지금 ‘의류회사 사장님’이다. 사회적기업 ‘참 신나는 옷’ 전순옥 대표이사 이야기다. 우리 머릿속의 ‘봉제공장’에서는 아직도 먼지가 풀풀 날린다. ‘봉제공장 노동자’라고 하면 ‘저임금 장시간노동’이 먼저 떠오른다. 1970년대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다. 실제로 전순옥 대표가 박사학위를 마친 뒤 돌아온 2001년, 그가 살펴본 창신동 봉제공장은 여전히 열악했다. 공장은 2~5명의 작은 단위로 쪼개져 있어서, 부가가치 높은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중국 등에서 수입된 의류 때문에 옷값이 떨어져, 노동자 임금은 1980년대 수준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잔업과 야근으로 인한 불안정한 생활도 여전했다. “그럼에도 저는 한국 봉제노동자들에게서 희망을 봤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분마다 ‘기술이 있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한국 의류산업은 자긍심도 크고 헌신성도 높은, 훌륭한 인적 자원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국 의류산업 인적자원 훌륭 문제는 산업이었다. 사실상 산업으로서 의류 생산은 방치되어 있다시피 했다. 기술력을 높이고 일을 고급화해 옷의 가치를 높이면, 노동자의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기술교육이다. 패션·봉제기술학교 ‘수다공방’이 그 구실을 한 곳이다. 그런데 사람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괜찮은 인력’이 일할 ‘괜찮은 일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구조적으로 어려워 보였다. 그때 결심했다. ‘사장님’ 이 되기로. 영국 유통회사 ‘존 루이스 파트너십’ 같은 기업이 그를 자극했다. 백화점 27곳, 슈퍼마켓 200여곳을 운영하고 있는 이 대기업은 사실 전적으로 노동자가 주인인 기업이다. 주식은 6만9000명의 직원이 나누어 갖고 있으며, 이들 모두가 ‘파트너’인 기업이다. 그러면서도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유지해 높은 부가가치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 “부평 공단에서 일할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근로자를 가족처럼’이라는 간판이 공장 앞에 커다랗게 붙어 있었지요. 하지만 가족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시스템이 없다 보니, 시장에서 어려워지면 기업주는 문을 닫고 떠나 버리더군요. 가족에게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텐데.” 주당 40시간 노동에 급여 150만원 지금 ‘참 신나는 옷’ 노동자의 주당 노동시간은 40시간 이다. 업계 평균은 70시간 수준이다. 그러면서도 평균 월 급여 150만원을 지킨다. 업계 평균 120만~130만원보다 높다. 물론 4대 보험도 제공된다. 비슷한 작업장 중 4대 보험을 제공하는 곳은 전체의 10%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가족처럼 여기는 기업이 되려면 여러 가지 시스템이 필요하다. 우리사주제도 같은 소유구조도 필요하다.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인력과 기술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마케팅 능력도 필요하다. ‘참 신나는 옷’이 교복 등 단체복 사업도 벌이고 있지만, 천연염색을 한 여성복 사업도 함께 벌이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노동자를 먼저 생각하는 기업이라고 해서, 결코 저가의 대중적 상품만 생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싸게 팔 수 있는 고급 제품이 나와서 소비자의 사랑을 받아야 노동자의 삶의 질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영어 한마디 하지 못하던 전 대표가 영국에서 유학하게 된 것은 순전히 ‘국제화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년 전 우연히 만난 일본 노동자에게서 “다니던 전자회사가 한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바람에 해고됐다. 한국 노동자가 밉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계기였다. 이제 일자리 문제는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므로, 노동자들끼리 소통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영국으로 가서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게 됐다. 그런데 이제 전 대표는 ‘대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자꾸 어려워져만 가는 노동자들에게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구호는 대안이 아니다. 노동자를 생각하는 기업의 체계를 갖추는 것, 그리고 그런 사회적기업이 한국 경제의 주류가 되는 게 대안이다. 착한 기업이 고부가가치의 질 좋은 제품을 들고 나가서, 소비자를 설득하며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40여년 전, 오빠가 꾸었던 것과 같은 꿈이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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