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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진보 진영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의 회의 모습. 경제정책연구소는 연구원과 인턴들이 함께 회의에 참석해 주요 안건을 논의한다. 워싱턴/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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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리뷰] Special Report
왜 독립 민간 싱크탱크인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글로벌 금융위기, 환경, 평화, 의료, 교육 등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의 종류와 규모는 엄청나다. 진단과 처방을 둘러싼 공화당과의 날카로운 정책대결 또한 피해 갈 수 없다. 이러한 미국과 세계가 나아갈 길을 둘러싼 ‘정책 대결’, ‘아이디어 전쟁’의 한복판에는 항상 미국 싱크탱크들이 서 있다.
미국 싱크탱크 영향력의 원천
미국 싱크탱크들의 언론 인용 빈도를 조사해 해마다 발표하는 ‘페어’의 마이클 돌니 연구원에 따르면, 2008년 한 해 동안 헤리티지재단, 미국기업연구소 등 보수 싱크탱크들의 인용 빈도는 전년 대비 10% 이상 떨어졌다. 반면 경제정책연구소, 예산정책우선순위센터, 경제정책연구센터 등 진보 싱크탱크들의 인용 빈도는 50% 이상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이는 정권교체 이후 진보 싱크탱크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 그만큼 커졌음을 뜻한다.
그렇다고 보수 싱크탱크들이 조용히 있는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보수주의자의 귀환’을 내걸고, 오바마 행정부의 재정·교육·의료·군사정책 하나하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연일 발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한 보수진영의 결집을 도모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들의 정책적 영향력은 단지 집권세력과 가까울 때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통해서도 발휘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현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음 집권기의 정책방향과 내용을 준비해 나간다. 미국 싱크탱크의 정책적·정치적 위상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정권 아래에서도 뚜렷이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싱크탱크들의 높은 위상은, 미국 사회의 구조적 조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우선 정당 차원의 정책 생산 능력이 취약하고, 우수한 능력을 갖춘 직업관료의 장벽이 높지 않기 때문에 싱크탱크들이 정책결정 과정에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싱크탱크들의 생존을 뒷받침하는 인적·물적 자원의 공급이 대학과 재단으로부터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 또한 중요하다. 전국적으로 연간 수천억원에 달하는 싱크탱크들의 연구 프로젝트가 각종 재단의 후원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책 영역과 학술 영역의 역할 구분이 비교적 뚜렷해, 정책 아이디어의 제안은 대학교수가 아니라 싱크탱크 연구원의 몫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정책에 영향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싱크탱크들에게 ‘권력과의 친밀도’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권력이나 재정적 후원자들의 입김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만 존재의 근거가 확보된다는 점은 반드시 강조된다. 미국기업연구소의 니컬러스 에버스태트 박사는 “독립적 연구기관으로서의 권위와 평판을 잃는다면 누가 우리 얘길 들어주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헤리티지재단(보수)이나 예산정책우선순위센터(진보)가 ‘정부로부터 한푼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독립성에 대한 확고한 의지표명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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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 토론회 모습. 워싱턴/탁기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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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논란 휩싸이는 국책연구소
최근 한국에도 독립 민간 싱크탱크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지는 것은, 국내 싱크탱크 생태계를 지배하는 국책연구소나 기업연구소들의 ‘독립성’에 대한 깊은 불신과 불만, 우려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지난 수년간 한국에서도 ‘한국판 브루킹스연구소’, ‘한국판 헤리티지재단’을 꿈꾸며 적지 않은 독립 민간 싱크탱크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희망제작소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등을 제외하면, 상근연구원이 아예 없거나 겨우 몇 명에 불과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반면 국책 연구소들의 사실 왜곡, 조작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참여정부 시기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무역효과를 과장하기 위해 통계 수치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현 정부에서도 4대강 사업의 실체를 왜곡했다는 소속 연구원의 양심선언까지 있었던 건설기술연구원, 세종시 부처이전 비용 및 손실을 지나치게 부풀렸다는 비난을 받은 한국행정연구원, 설립 20년 만에 노조의 쟁의행위와 직장폐쇄까지 단행되었던 노동연구원 등 국책 연구소들의 연구 결과와 조직 운영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더욱이 그동안 ‘준싱크탱크’ 구실을 해왔던 시민단체나 대학(교수)의 역량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고, 정당(부설 연구소)의 정책 역량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결국 독립 민간 싱크탱크의 위상과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선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적자생존 대신 상호검증·협력을
우선 매우 제한된 자원을 나눠가지는 현실에서, ‘각자 살아남기’식 전략을 유지하는 것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민간 싱크탱크 대부분은 영세한 재정구조, 열악한 상근구조를 일부 독지가나 약간의 소액후원자, 네트워크형 지식인 참여로 보완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상당수가 서로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싱크탱크들이 서로 합쳐 하나의 거대한 싱크탱크를 만드는 것이 당장 불가능하다면, 각각의 자원과 역할을 훌륭히 ‘조정’해낼 수 있는 ‘네트워크 코디네이터’ 싱크탱크의 등장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지난 2008년 미국 대선 과정에서 진보 싱크탱크들이 서로 협력하여 힘을 배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진보센터와 같이 큰 규모의 싱크탱크 때문만이 아니라, 작지만 뛰어난 조정자 구실을 충실히 수행한 코먼윌연구소의 공이 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개별 연구소들의 성장 전략을 넘어서는, 정책지식 생태계 자체의 구조 변화가 요구된다. 국책 연구소나 기업 연구소, 정당 연구소 등이 보유하고 있는 인적·물적 자원이 민간 싱크탱크들로 충분히 재배분될 가능성은 매우 작다. 하지만 싱크탱크들 사이의 상호검증과 경합, 협력의 과정은 빨리 시작될 수 있다. 체급과 종목이 다르다고 서로 무시하는 행태가 지양되고, 하나의 링에서 서로 겨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올해 경제전망이나 재정정책에 관한 각 기관의 연구보고서가 서로 치밀하게 검토되고, 그것의 수준과 의미가 객관적으로 짚어지도록 함으로써, 연구자 개인과 기관의 ‘평판’을 측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비단 기존 싱크탱크들에 대한 불신을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새롭게 성장하는 민간 싱크탱크들의 수준과 위상을 증명하고 제고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독립 민간 싱크탱크들이 정책결정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대중과 전문가들의 관심과 후원을 얻어나갈 때에야, 스스로 내걸었던 ‘한국판 브루킹스연구소, 헤리티지재단’의 꿈에 좀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홍일표 한겨레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iphong173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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