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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의 새 활로 ‘비영리 저널리즘’
권력에 대한 성역 없는 감시는 언론의 본질적인 책무이다. 언론이 수행하는 민주주의의 보루 구실을 가장 충실히 구현하는 저널리즘이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ing)라 할 수 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진 <워싱턴 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나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관련 연구 논문 조작을 밝혀낸 <문화방송>의 ‘피디수첩’처럼 탐사보도는 부패와 협잡의 그늘에 은폐된 진실을 햇빛 아래 드러내 세상을 변화시켰다.
탐사보도가 해야 할 역할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지만 신문사나 방송사와 같은 대중매체에서 이는 더이상 ‘인기상품’도 ‘대표상품’도 아니다. 치열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매체들은 취재에 많은 품과 시간이 들고, 돈도 많이 쓰는 탐사보도 조직을 축소하거나 없애는 추세다. 더욱이 탐사보도를 하는 언론사는 정치권력을 가진 자와 갈등하거나 주요 광고주인 대기업과 맞설 것을 각오해야 한다. 쪼그라드는 광고 시장에서 이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언론사주에겐 폭로 기사가 달갑지만은 않다. 굳이 ‘심층보도’나 ‘탐사보도’까지 갈 것도 없이 현안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보도하려는 일선 기자들의 노력마저 이런저런 이유로 굴절되는 상황이다.
권력·광고주 눈치 안보는 ‘감시견’ 역할
그런데 전통 미디어에서 찬밥 신세이던 비판적 탐사보도가 ‘비영리 저널리즘’(Non-profit news 또는 Philanthrojournalism)을 통해 새로운 활기를 얻고 있다. 비영리 저널리즘은 광고나 구독료로 운영되는 일반 언론사와 달리 재단이나 독지가의 기부를 재원으로 해 뉴스를 생산, 보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 비영리 언론사도 때로는 콘텐츠를 팔거나 광고를 받기도 하지만 부수입에 가까울 뿐 경영의 기조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비영리 저널리즘은 권력이나 광고주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독자의 말초적 흥미에 영합할 필요도 없어, 심층보도를 위주로 한 ‘감시견’(watchdog)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2005년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비영리 뉴스 매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 중 다수는 국가, 지역사회, 경제권력 비판과 감시에 집중하는 독립 언론을 표방하고 있다. 아메리칸대학의 저널리즘 연구소인 ‘제이랩’(J-Lab)에서 조사한 데 따르면 미국의 자선단체들은 비영리 뉴스 매체에 2005년부터 2009년까지 1억2800만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기부금 가운데 절반이 뉴욕의 프로퍼블리카, 버클리의 ‘탐사보도센터’(The Center for Investigative Reporting), 워싱턴의 ‘공직청렴센터’(The Center for Public Integrity) 등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언론사나 이를 지원하는 기관으로 갔다.
2년 연속 퓰리처상 받은 프로퍼블리카
2007년 맨해튼에 설립된 프로퍼블리카(propublica.org)는 온라인 매체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연속으로 이 상을 받았다. 지난해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2005년 여름, 뉴올리언스의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본 일부 환자를 안락사시킨 것을 2년 반 동안의 끈질긴 취재로 밝혀내 상을 받았다. 또 올해는 금융회사들이 어떻게 부동산 거품을 조장해 고객에게 손실을 입히고 금융위기를 불러왔는지를 심층 취재한 기사로 두번째 상을 받았다. 금융업으로 큰돈을 번 허버트 샌들러가 이 회사에 매년 1000만달러씩 기부하기로 하고, 퓨(Pew) 자선신탁 같은 재단에서 1~2년간 100만달러 내외를 지원한다. 그럼에도 프로퍼블리카 웹페이지는 자본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기 위해 광고도 싣지 않는다.
1977년 설립된 탐사보도센터는 2009년 10명의 기자로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관련된 탐사보도를 하는 ‘캘리포니아 워치’(californiawatch.org)란 매체를 만들었다. 초기 재원은 제임스 어바인 재단 및 윌리엄 앤 플로라 휼렛 재단이 반씩 내놓은 240만달러의 기부금으로 마련했다. 지진대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지역 학교들이 지진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탐사보도하는 등 캘리포니아 지역의 교육, 환경, 안전 등에 특화된 심층보도로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조지 소로스의 조건없는 후원으로 활기
방송기자 출신인 찰스 루이스에 의해 1986년에 세워져 행정난맥상, 로비, 선거자금, 기후변화 등의 이슈를 심층취재해 온 ‘공직청렴센터’(iwatchnews.org/about)는 한 해 예산 400만달러 가운데 300만달러 정도를 재단이나 개인의 기부, 콘텐츠 판매 등으로 충당하고 있다. 한때 재원 조달이 어려웠으나 조지 소로스가 투명사회를 위해 조건 없이 후원하기로 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이 단체는 최근 <워싱턴 포스트>와 손잡고 부동산 대출 문제를 심층 보도해 부실한 6개 대출 업체가 퇴출되도록 하고 구조조정 비용 약 1억달러를 절감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4월 처음으로 ‘탐사보도국’(Bureau of Investigative Journalism: thebureauinvestigates.com)이란 비영리 매체가 런던 시티대학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소프트웨어 개발로 큰돈을 번 데이비드 포터와 <선데이 타임스> 기자 출신인 일레인 포터 부부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재단을 통해 200만파운드를 기부해 설립되었다. 탐사보도국은 지난해 <위키리크스>와 함께 이라크전 관련 미국 문서파일들을 공개해 앰네스티상을 수상하는 등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이 밖에도 <샌디에이고의 소리>(Voice of SanDiego)처럼 지역사회에 밀착해 심층보도를 하는 비영리 언론사, 건강보도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에 후원한 카이저 재단의 경우처럼 보건, 과학, 예술 같은 특정 분야에 집중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받는 비영리 언론사, 세계적인 조직망을 갖춘 비정부조직(NGO)이 정보력을 활용해 심층적인 뉴스를 생산하는 등 다양한 비영리 언론 모델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들은 취재지원을 받고 자신들이 발굴한 기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사기획, 취재, 배포 등의 과정에서 신문, 방송 등 전통 매체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협력의 범위도 지역사회나 국가 내의 매체끼리를 넘어 국제적인 협력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프로퍼블리카는 제휴관계를 맺은 언론들과 협력해 작성한 기사를 자사 웹사이트에 올림과 동시에 어느 언론사든 무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사장 겸 편집인인 폴 스타이거(69)는 “(협력) 취재는 쪼갠 뒤 다시 합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캘리포니아 워치’는 지역 내 대부분의 신문·방송·온라인 등 전통 매체 기관과 협조관계를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미디어 네트워크를 발족했다. 또 영국의 ‘탐사보도국’ 역시 <비비시>(BBC), <채널4 뉴스>, <파이낸셜 타임스>, <르몽드> 등 유력 매체와 긴밀히 협력해 탐사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공직자 급여 문제를 광범위하고 심층적으로 취재한 기획이 <비비시>의 대표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파노라마’를 통해 전파를 탔고, 이 프로그램을 다시 보려고 많은 누리꾼이 몰려 이 사이트가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방문자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전통 신문·방송과 기획·취재·배포 협력
전통 매체도 이들 비영리 매체들과 함께 심층보도를 진행할 경우 기간과 비용이 절감되는 효과를 누린다. 아울러 대형 특종이 터져나오고 뒤늦게 체면을 구기면서 받아쓰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비영리 탐사보도 언론은 기존 언론이 탐사보도나 심층보도를 급속히 줄이지 않도록 하거나,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견인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bhlee@hani.co.kr
왜 비영리 저널리즘인가
언론 위기로 자선단체의 저널리즘 지원 인식 확산
탐사보도가 비영리 언론 모델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된 것은 ●언론 위기에 대한 자선단체의 인식 전환 ●유능한 기자들의 실직 ●인터넷에 의한 전달비용의 감소 등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전통적인 뉴스 미디어인 신문산업이 독자와 광고의 감소로 빠르게 위축되면서 양질의 저널리즘을 지원해야 한다는 인식이 미국 내 자선재단 관계자들 사이에 확산됐다. 아메리칸대학 제이랩 이사 잰 셰이퍼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선기관들이 저널리즘이 지원할 만한 것이란 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신문·방송의 경영이 악화되고 저널리즘 기능이 위축되자 실력있는 기자들이 보람있게 일할 매체를 찾아 나서게 된 것도 비영리 모델의 역량 강화에 도움이 됐다. 프로퍼블리카를 세운 폴 스타이거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장수 편집장이었다. 그는 1991년부터 16년간 편집장을 지내며 <월스트리트 저널>이 16번의 퓰리처상을 받을 만큼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 신문이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에게 팔리자 사표를 냈다. 그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언론’을 만들겠다고 하자 850명의 전현직 기자가 몰렸고 이 중 30명의 ‘베테랑’ 기자가 선발됐다.
재벌은 언론으로, 기자는 들판으로
비영리 탐사매체가 가능하게 된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인터넷 덕분에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많은 독자나 시청자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기사가 충격적이고 취재의 질이 우수하면 거대한 윤전기나 위성방송시설이 없어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퍼지고, 이는 다시 전통 매체의 후속 보도를 유도해 엄청난 영향력을 만들어 낸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비영리 매체 <베이 시티즌>의 에디터 조너선 웨버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전통 미디어는 위기이지만 언론인이란 직업의 위기는 아니다”라며 “여러 면에서 지금은 저널리즘에 기회”라고 말했다.
이처럼 비영리 모델과 심층, 탐사보도의 결합은 저널리즘의 새로운 흐름이 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최근호(7월9일자)도 저널리즘의 미래를 조망하는 기사에서 비영리 모델이 하나의 뚜렷한 추세로 자리잡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넷 발달로 저비용언론 가능해져
기부금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일부 상업적 활동을 섞은 혼합모델로 수지를 맞추는 것도 가능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센트루이스 비컨>, 미니애폴리스의 <민포스트>, 오스틴의 <텍사스트리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베이 시티즌> 등이다. 예를 들어 <베이 시티즌>의 재원은 크게 4곳에서 나오는데 독지가의 거액 기부, 회원으로부터 받는 소액의 찬조금, 다른 매체에 신디케이티드로 뉴스를 팔고 받는 콘텐츠 요금, 웹사이트에 뜨는 특정한 뉴스에 대해 기업의 협찬을 받는 것 등이다.
물론 이런 비영리 모델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도 있다. 비영리 모델이 전통 미디어의 기능을 대신할 만큼 성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비영리 방송 체인인 미국공공미디어(American Public Media)의 최고경영자 빌 클링은 “기부에 기반한 모델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지금까지 어떤 매체가 설립돼 상당히 성장할 때까지 지원을 계속 할 수 있는 재단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속가능한 모델로 정착할지는 미지수
이러한 회의적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고 정부를 견제하는 저널리즘의 임무가 위기에 처해 있고, 이런 위기를 돌파하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전통 미디어는 지금 광고 매출 감소와 구독자 감소로 점점 어려운 처지에 몰리고 있다. 언론인 몇 명이 모여서 온라인 뉴스 사이트를 열어보지만 온라인 광고시장이 이들을 먹여살릴 만큼 충분치 못한 게 사실이다.
시라큐스 대학의 저널리즘 교수 빈 크로스비는 “우리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일어나기보다는 전통 미디어의 뉴스 예산이 빠르게 위축되는 ‘정보의 회색 시대’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기부에 기반한 비영리 언론 모델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로그뉴스 <허핑턴 포스트>의 창업자 아리아나 허핑턴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에 석좌교수 기금을 기부하듯이 전국이나 지역을 무대로 활동할 비영리 저널리즘에 기부하는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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