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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생산자로서의 시민 참여가 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월11일 경기도 수원에서 열린 2011 수원시민 창안대회 결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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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 싱크탱크|‘1인 싱크탱크’ 시대 성큼
싱크탱크는 석사나 박사 학위를 가진 상근 연구원이 많을수록 역량이 우수할까? 지금까지는 당연히 그랬다.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나 미국기업연구소, 헤리티지재단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세계의 대다수 연구소는 이런 좋은 여건과 거리가 멀다. 그래도 자신만의 특색있는 연구로 규모가 작은 단점을 극복하고 영향력을 키우는 곳이 많다. ‘부티크’라 불리는 미국의 싱크탱크들이 그런 곳이다.
미국의 대표 싱크탱크 가운데 하나인 ‘새로운 미국재단’의 스티브 클레먼스 연구위원은 연구원을 뽑을 때 “학위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우선시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 싱크탱크에 기자나 작가 출신이 유독 많다. 연구자의 전문성은 단순히 학위로만 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네트워크형 싱크탱크는 상근자가 아예 없거나 한두명에 불과하지만, 외부 전문가의 참여를 적절히 조정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참여사회연구소나 코리아연구원과 같은 곳들이 좋은 예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정치, 사회분야 국내 싱크탱크 가운데 영향력 2위의 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예 ‘1인 연구소’를 내세우기도 한다. ‘○○○경영연구소’처럼 자기 이름을 걸고, 주로 경영 컨설팅이나 강연, 저술활동을 벌이는 연구소들이다. 그중에는 연간 수백회 강연과 공세적인 출판 활동을 통해 연 10억원 이상을 벌고 상당한 대중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도 있다. 이들에게 ‘전문가 1인’은 역량의 전부인 셈이다.
소셜네트워크로 공유·참여 쉬워져
일반적으로 ‘전문가’란 자격(증)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술과 지식을 ‘직업’ 밑천으로 삼는 사람을 말한다.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전문가의 역할과 역량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사실은 1인 연구소나 브루킹스연구소, 헤리티지재단이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런 오랜 틀을 깨는 변화가 최근 포착되고 있다. 높은 학위도, 사무실도, 경제적 대가도 없지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연구를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가 정보의 공유와 개인의 참여를 쉽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디어로 연결된 개인은 더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며, 아마추어 역시 그저 ‘비전문가’란 말로 부르기 어렵게 되었다. 정책제안과 연구를 취미로 시작했지만, 전문가 못잖게 된 이들이 산재해 있고, 또 서로 연결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지난 2월11일 경기도 수원 화성박물관에서는 2010년에 이어 두번째 ‘수원시민 창안대회: 수원을 D.I.Y.하라’ 최종 결선대회가 열렸다. 결선에 오른 다섯 팀 가운데 ‘대박난 한평’ 팀의 ‘한평 퇴비장’이 1등에 선발되었다. 낙엽과 김장쓰레기를 이용해 퇴비를 만드는 작업인데, 그 과정에 아파트 주민의 참여를 쉽게 해 마을공동체 정신을 키우는 정책효과가 기대된다는 게 우수 정책제안으로 뽑힌 이유였다. 행사를 주관한 희망제작소 곽현지 사회혁신센터 팀장은 “아이디어의 단순 제안을 넘어 전문가와 시 정부가 아이디어의 실행을 돕는 방식”이라고 대회의 의미를 평가했다.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는 아니지만, 적절한 플랫폼과 관계, 기회가 제공되면 얼마든지 훌륭한 정책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 스스로 문제 찾고 대안 모색
이런 믿음은 서울시의 정책제안 프로그램인 ‘천만상상 오아시스’에서도 확인된다. 최순임 서울시 시민창안팀장은 “(시민의 정책제안은) 지금까지 채택률이 매우 낮지만, 앞으로 그 비율을 더 높이고, 서울시의 여러 정책제안 통로를 ‘천만상상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정비할 계획”이라고 했다. 두 프로그램은 모두 기존의 ‘아이디어 경진대회’나 정책제안 프로그램들에 비해 정부의 능동적 역할, 시민과 정부 사이의 관계 변화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진전된 것이다. 다만 (정책)지식 생산자로서의 시민들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갈지에 대한 고민은 좀더 필요하다. 아울러 행사를 개최하고, 누리집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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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크카페의 ‘모·떠·꿈’ 프로그램 중 ‘내가 알고 있는 새로운 방법들’ 교육. 씽크카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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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지원 없이 시민들 스스로 정책 문제를 발굴하고, 해법과 대안을 모색하는 실험도 늘고 있다. 이들이 모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는 플랫폼 역시 다양하게 제공되고 있다. 지난해 10월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전국 각지에서 총 49가지 주제를 다루는 ‘오픈 콘퍼런스’가 진행되었다. 콘퍼런스의 형식과 제안 주체도 다양했다. 제안자에는 개인도 있고 단체도 있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선택기준은?” “인터넷 광고 보지 않을 권리”와 같은 생활 이슈에서부터 “뉴타운 재개발 문제점과 대안” “사학비리를 어떻게 끝장낼까”와 같은 심각한 주제들까지 다뤄졌다. 리빙 라이브러리, 월드카페, 레츠 콘퍼런스, 바캠프, 타운홀미팅, 이그나이트 등 새로운 토론 방식이 사용되었고, 그 과정과 결과는 기록, 정리, 공유되었다.
콘퍼런스는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더 체인지’의 ‘씽크카페’를 플랫폼으로 조직됐다. 조양호 씽크카페 기획 코디네이터는 “의제 생산은 더이상 전문가만의 몫이 아니며 이미 ‘프로아마추어’의 시대”라며 “우리의 취지는 전문가와 대중이 모이고 떠들면서 새로운 의제가 사회화되는 것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씽크카페의 활동은 주요 의제를 미리 선정하여 진행하는 ‘씽크카페@대화’, 교육 프로그램 ‘모·떠·꿈’, 오픈 콘퍼런스 등에 집중될 것이라고 한다. 조양호 코디네이터는 “5년 후에는 5일간에 걸쳐 전국 300여곳에서 동시에 콘퍼런스가 열리는 모습을 상상한다”며 “그렇게 되면 무시하기 힘든 사회적 발언으로 다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집단지성 만드는 프로아마추어들
씽크카페는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가 많이 결합하고, 새로운 방식을 통한 전문가-대중의 관계 변화를 도모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반면 ‘지식피디(PD) 씽크넷’에는 1970~8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과 고민을 공유한 이들의 참여가 많다는 특색이 있다. 매달 회비를 내는 정회원과 사이트에 가입해야 하는 준회원을 합쳐 회원이 200명이 넘는다. 이들은 집단지성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초록문명사회로의 전환을 꿈꾸고 각자의 지식, 경험,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스스로를 ‘지식 생산자’ ‘잡사’(雜士) ‘1인 독립 연구소’라 부른다. 모임의 대표 멍석지기를 맡고 있는 임진철 유한대학 교수는 “감독을 중심으로 시나리오, 제작 플랫폼이 결합되는 할리우드 영화 생산방식과 같다”며 “한사람이지만 언제든지 수백명이 될 수 있다”고 운영원리를 설명했다.
“할리우드 영화생산 방식과 같아”
2008년에 시작된 지식피디 씽크넷은, 올 2월 말 설립된 ㈔청미래재단의 사업으로 전환된다. 일상 활동은 월례 ‘지식콘서트’와 ‘수요일의 저녁식사(작은 지식향연)’로 구성되고, 청미래마을 설립, ‘유라시아 생태평화 문화대간 프로젝트’ 등 다양한 사업을 이미 진행하고 있다. 초기부터 모임에 참여해 온 김보성 경남문화콘텐츠진흥원장(전 노찾사 대표)은 “인생 후반부의 새로운 관계망을 만난 셈이다. 농촌마을 공동체 재건을 위한 생활문화축제 구상 등을 함께 토론하면서, 실행을 도모하고 있다”고 했다. 본인의 아이디어와 관심, 열정이 다른 이들과 공유되면서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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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피디 씽크넷의 2010 문화대간 지리산 잔치 한마당. 씽크카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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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많아지면 달라진다> 등을 쓴 클레이 셔키 미국 뉴욕대 교수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범주,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공유 메커니즘, 이윤 창출의 방식에서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과 모바일, 에스엔에스에 의해 연결된 사람들이 시간과 능력을 공유함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위키피디아를 떠올리면 쉽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는 흔들리고, 중첩되고, 재구성된다. 씽크카페와 지식피디 씽크넷에 모인 사람들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다. 만남을 통해 지식은 공유되고, 제안은 다듬어진다. 이렇게 누구나 싱크탱크를 만들 수도 있고, 연구원일 수도 있는 세상이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더 계속될지, 기대하는 만큼의 영향력과 정책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속단하기 어렵다. 씽크카페나 지식피디 씽크넷 관계자들 역시 정책적 영향력을 거론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가장 성공한 모델로 평가되는 위키피디아조차 선의의 협력만이 아니라 수많은 갈등도 존재한다. 영향력의 발휘와 갈등의 조정은 ‘숫자의 증가’로 자연스레 해결되지는 않는다. 셔키 교수 역시 “공적 가치나 시민적 가치를 만들어 내려면 그저 재미있는 사진을 올리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핵심 참여자 그룹의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고, 집단은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는 구성원들에게 보상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새로운 변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참여와 협력의 기회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배제와 장벽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이 그저 시대에 뒤처진 자로 다뤄져서는 안 될 것이다. 변화를 주도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노력과 더 넓은 시야를 요구하는 까닭이다.
홍일표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iphong173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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