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9.25 13:37
수정 : 2012.09.2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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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준상 울산과기대(UNIST) 디자인인간공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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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I Network]
주목받는 ‘제품·서비스 시스템’
현대인의 과소비를 비만과 비교한 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서 오스트리아 빈(비엔나)공대 적정기술연구소 강명주 박사는 “과소비와 비만은 그 원인이 비슷하다”며 “물질적인 풍요와 함께 사회·정신적 욕구불만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물건을 소비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가계빚 증가, 가정불화, 오염물질 발생 같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만약 소비자의 욕구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환경오염은 줄이고 경제·사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과소비의 폐해를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실제 사례가 있다. 미국의 베터플레이스라는 회사는 사람들이 전기차의 장점이 많은데도 비싼 배터리 가격 때문에 구입을 꺼리는 데 착안해 배터리를 사지 않고 빌려쓰는 전기차 충전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소비자는 전기차를 살 때 배터리를 제외한 차를 구입하고 배터리는 빌려쓴다. 배터리 사용료는 달린 만큼만 내기 때문에 휘발유 자동차를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과 비용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베터 플레이스는 현재 이스라엘, 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 중국 등에 전기차 충전 시스템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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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의 서비스화가 지속가능한 생산과 소비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은 미국 베터플레이스사의 전기차 충전시스템. 베터플레이스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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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만족과 환경오염 방지 동시추구
일본의 파나소닉은 2001년부터 발효된 가전 리사이클법이 정한 대로 폐형광등으로 인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고효율 에너지 절약형 조명기기를 리스하는 ‘아카리 E 서포트’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조명기기의 설치부터 유지보수, 폐전구의 수거, 재활용 및 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판매사가 책임진다. 소비자는 에너지 효율이 높은 반면 가격이 비싼 조명기기를 리스해서 쓰고 절약한 에너지 비용의 일부를 서비스 이용료로 치른다. 이 사업의 결과 파나소닉의 폐전구 재활용률은 10%에서 90%로 증가했고 연간 매출은 30억엔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공공부문의 사례도 있다. 서울시에서는 2012년 5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니는 영아들을 대상으로 천기저귀 사업을 시작했다. 천기저귀 사용을 원하는 영아의 학부모들은 천기저귀를 어린이집에서 받아 사용하고, 세탁전문업체는 이를 수거해 세탁, 살균 등 가공처리 후 어린이집에 배달한다. 한 달에 5만4천원의 비용이 발생하는데 50%는 학부모가 부담하고, 50%는 서울시에서 지원한다. 일회용 기저귀와 비슷한 가격으로 세탁의 번거로움 없이 천기저귀를 사용하면서 환경오염도 줄이고 지역 세탁업체도 지원하는 일석삼조 효과가 있다.
이런 사례들의 공통점은 사업 목적이 제품 판매가 아니라 소비자의 궁극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있다는 점이다. 서비스에 포함된 제품은 이제 판매 대상이 아니라 기업의 자산이다. 따라서 유지보수를 통해 가능한 한 오래 사용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제품의 폐기량도 줄일 수 있다. 또 단일 제품보다 제품-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편이 소비자의 욕구를 더 효과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고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그뿐인가, 보통 이런 서비스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협력을 필요로 하고 서비스 산업을 발전시켜 기업 간의 상생, 일자리 창출이라는 긍정적인 사회적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틀어 제품의 서비스화 또는 제품-서비스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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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의 서비스화가 지속가능한 생산과 소비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은 미국 베터플레이스사의 전기차 충전시스템. 베터플레이스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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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대중교통도 ‘제품 서비스화’ 사례
사실 이 시스템은 우리에게 그리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월세 또는 전세, 교육 서비스, 호텔, 레스토랑, 대중교통 등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의 서비스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제품-서비스 시스템이 새삼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기존 제품 판매 중심의 사업모델을 서비스화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제, 환경, 사회적 가치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이 시스템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확산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제품과 서비스의 통합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실시했고 산업부문과 공공부문에서 이를 적용하고 있다. 미국도 90년대 후반부터 제품의 서비스화를 시작했고 최근 들어 친환경적인 사업모델로 그린서비사이징을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8년부터 환경친화적 산업구조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관련 법률을 제정하고 제품-서비스 시스템 산업 육성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모든 제품이 서비스화되었을 때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거나 애착을 느끼는 제품보다는 기능이 우선시되는 제품이 서비스화되었을 때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많은 사람들에게 서비스란 제품을 사면 따라오는 ‘덤’으로 인식돼 대가를 지급하는 데 인색하다. 개발도상국에서 만들어내는 저가 제품이 난립하는 것도 제품-서비스 시스템 확산에 걸림돌이다. 하지만 환경 규제가 갈수록 심해지고 기업의 사회공헌에 대한 요구는 높아지는 오늘날 제품-서비스 시스템은 소비자에겐 지속가능한 소비의 실천이고 기업에는 새로운 블루오션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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