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 리뷰] 네트워크
서울혁신파크의 ‘공유자적’ 실험
“좋은 공간이란 여럿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려면 어린이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엄마의 눈이 아니고요.”
“도시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4~5월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서울혁신파크에서는 ‘공유자적’(共有自適)라는 이름의 행사가 연달아 열렸다. 옛 질병관리본부 단지로 총 31개의 건물 중 16개가 비어 있는 이 서울혁신파크의 ‘공(空)간’을 어떻게 ‘공(共)간’으로 변화시켜야 할지, 그 답을 찾기 위한 기획 행사들이었다.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
|
지난 4월29일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옛 질병관리본부)에서 ‘프로젝트 포 퍼블릭 스페이스’의 이선 켄트 부회장이 장소 만들기 프로젝트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제공
|
4월29일에는 1975년 설립돼 미국 50개주, 세계 40여 나라에서 3000여개의 ‘장소 만들기’(Place Making)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비영리기관 ‘프로젝트 포 퍼블릭 스페이스’(Project for Public Spaces·PPS)의 이선 켄트(38) 부회장 초청 강연이 있었다.
그는 ‘피피에스’의 설립 철학인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도시에서 공공 공간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만나고, 시간을 보내고,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장터를 만든다면, 물건을 살 필요가 있을 때만이 아니라, 쉬거나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소개한 최근의 프로젝트 중에서 눈길을 끈 것은 활력을 잃은 미국 디트로이트의 도심에 모래사장을 만들었던 일이다. 그저 모래를 옮겨놓고 해변용 의자와 음식 가판대를 설치했을 뿐인데도 시민들이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일시적 프로젝트이긴 했지만 이 성과가 바탕이 돼 ‘피피에스’는 현재 디트로이트시와 도심 조성의 다음 단계를 논의하고 있다.
놀이터도 아이들 관점서 바라봐야
5월23일에는 독일의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73)가 초청 강연을 했다. 이날 강연 장소인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스페이스류는 ‘엄마’들로 가득 찼다. 센터가 있는 단지 안에 구립 어린이집이 있고 녹지가 많은 편이어서 평소에도 아이를 동반한 엄마들이 자주 오가는 편이지만, 이날처럼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주최 쪽이 아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 덕분이면서 동시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 대한 높은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저는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늘 어린이들의 욕구를 관찰합니다. 그 욕구는 바로 ‘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벨치히는 어린이의 욕구에 대해 설명하기 전 한 가지 주의를 줬다. “다들 자신도 어린이였던 시절이 있기 때문에 어린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각색되기 때문에 어른이 어린이를 안다고 섣불리 자신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
‘프로젝트 포 퍼블릭 스페이스’는 활력을 잃은 미국 디트로이트의 도심에 최근 모래사장을 만들었다. 모래를 옮겨놓고 해변용 의자와 음식 가판대를 설치했을 뿐인데도 많은 시민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제공
|
그는 뻥 뚫린 공간 한가운데 그럴듯한 놀이기구가 설치돼 있는 일반적인 놀이터에 대해 “엄마들을 위한 공간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어린이들에게는 그런 놀이기구보다는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놀 여지가 있는 공간이 필요하며, 이 공간에는 어른들의 시야에서 차단된 비밀스러운 장소가 포함돼 있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특히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 엄마들은 깜짝 놀라 수군거리기도 했다. 벨치히는 “아이들이 위험한지 여부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스스로 경험하면서 위험을 판단하는데, 일일이 ‘떨어지지 마라’, ‘넘어지지 마라’ 잔소리를 하는 것은 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놀이터에 대해 “바보 같다”고 혹평했다. 다 똑같고, 어린이를 배려하지 않은 형태라는 것이다. 거창한 체험기구들을 들여놓는 최근 추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지적을 하면서 “엄마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지 말고 아이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라”고 당부했다.
옥상텃밭에서 레스토랑, 음악회까지
5월29일에는 ‘도시농업, 서울 사회적 경제를 만나다’라는 이름의 행사가 열렸다. 미국 디트로이트시 도심에서 ‘푸드 필드’라는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앨릭스 브라이언(30), 싱가포르에서 ‘에더블 가든스’라는 이름으로 옥상 텃밭 조성 활동을 하고 있는 비욘 로(34), 그리고 파릇한절믄이협동조합, 에코11, 텃밭보급소 등 국내의 대표적인 도시농업기업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각자의 사례를 나눈 뒤 어떻게 공간을 운영하고 유지해 나가야 할지를 토론했다. 한국·싱가포르·미국의 도시농부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고민은 어떻게 공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느냐는 것이었다. 파릇한절믄이협동조합의 이예성(28) 대표가 “옥상 텃밭을 통해 일상에서 접근 가능한 도시의 대안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긴 하지만 그다음 단계가 고민이다”라고 하자, 비욘 로 대표는 “옥상 텃밭에 머물지 말고 옥상 레스토랑으로 가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다. 공간의 새로움뿐 아니라 음식 재료에 대한 신뢰도 갖춘 비즈니스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텃밭보급소 안철환(52) 대표가 “단순한 레스토랑을 넘어서서 ‘옥상 음악회’ 등이 열리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가자”고 제안해 호응을 얻었다.
이런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서울혁신파크는 최근 2~3년 사이에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청년일자리허브,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인생이모작지원센터 등 사회적 경제 관련 조직들이 입주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지만, 아직은 ‘옛 질병관리본부 단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서울혁신파크 조성 계획’을 통해 혁신발전소, 혁신도서관, 어린이 복합놀이공간 신설 등을 발표했다. 상업적인 재개발보다는 시민들의 필요와 사회혁신을 위한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모이는 방식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다.
본격적인 개발 전이지만 서울혁신파크에 입주한 4개 센터는 실무협의회를 구성해서 ‘혁신과 공간’에 대한 논의와 그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공유자적’ 시리즈를 통해 화두를 던지는 한편 청년과 베이비부머 은퇴자가 짝을 이뤄 일구는 도시 텃밭, 사회적 경제 창업자들이 기술과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는 작업장 등을 만들어 가고 있다.
황세원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팀장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