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31 17:18
수정 : 2015.03.31 17:25
영국 사회혁신 현장을 가다
굴벤키안 재단 대표 앤드루 바넷 인터뷰
런던에 자리잡은 칼루스트 굴벤키안 재단(이하 굴벤키안 재단)은 60년 역사를 가진 영국의 대표적인 민간재단 중 하나다. 사회문제 해결에 전문성이 있는 단체와 활동가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사회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리스본·파리·런던 세 곳에 지부가 있고, 1년 예산이 1억유로(약 1200억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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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칼루스트 굴벤키안 재단 대표 앤드루 바넷. 스프레드아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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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2일 영국 런던 굴벤키안 재단 사무실에서 앤드루 바넷 대표를 만나 재단이 생각하는 사회혁신과 전략, 민간재단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굴벤키안 재단의 비전과 전략을 소개해달라.
“설립자인 칼루스트 굴벤키안은 혁신적 사고와 협력을 통한 새로운 모델 개발을 강조했다. 이것이 굴벤키안 재단의 철학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굴벤키안 재단은 혁신과 협력을 활동의 중심에 둔다. 다양한 기관의 전문성을 파악하고 분야가 전혀 다른 기관들을 서로 연결해 협력과 혁신을 만드는 것이 우리 재단의 비전이다.”
-다른 재단과 구별되는 차별점은 무엇인가?
“재단이 집중하는 부분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문제를 찾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사회의 아픈 곳을 찾아 막혔던 흐름이 다시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다른 기관들과 협력을 통해 수행하는 데 있어 우리의 독특한 위치는 유용하다. 굴벤키안 재단은 1억유로의 예산을 집행하는 큰 조직이지만, 영국 지부만을 놓고 보면 작은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규모가 큰 기관들의 생리와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면서도 어느 누구와도 수평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세 나라의 지부를 통해 국경을 넘은 협업에도 익숙하다.”
실패에서 진짜 중요한 걸 배울 수 있어
-재단이 생각하는 사회혁신이란 무엇인가?
“혁신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서비스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만을 생각한다. 우리 재단이 생각하는 혁신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변화의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사회 변화는 시스템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한 지점의 작은 변화가 다른 지점에서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 가는지 주목해야 한다.”
-사회혁신을 주도할 때 민간재단은 정부 등 공공 영역의 역할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우선 민간재단은 실패할 자유가 있다. 실패는 정말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다. 수행하는 프로젝트가 원래 의도했던 결과가 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한 사회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독립적인 구성원들이 새로운 실험을 통해 사회의 막힌 부분에 혁신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를 가지고 혁신적 실험이 가능한 것은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선거에서 선출된 정치인이나 공공자금을 사용하는 공공기관은 이러한 자유를 갖기 힘들다. 굴벤키안 재단은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영국 시민사회는 그보다 더 긴 수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자선재단과 시민사회가 해왔던 일은 지금의 정부가 제공하고 있는 사회복지 영역이다. 점점 사회복지 영역에서 정부 역할이 커지면서 시민사회와 민간재단의 역할은 혁신적인 실험을 통해 사회 흐름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자리잡아가는 추세다.”
다양한 기관들의 혁신 위한 협력 지원
-혁신은 새로운 해결 방식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많은 위험을 동반하기도 한다. 과감한 시도로 실패한 경우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은 책임 소재를 묻고 파트너를 탓하는 것이다. 프로젝트 시작 당시 기대했던 성과가 만들어지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새로운 모델이 어떻게 작동하고, 혹은 왜 작동하지 않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더불어 실험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두번째 안을 준비한다. 우리가 투자한 프로젝트에서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성과 이외의 다른 성과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지도 함께 고려해본다.”
재단은 사회혁신가와 풀뿌리 사회혁신 단체들을 지원하고 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주요 파트너들과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선 중요한 것은 신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파트너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곳에서 왔는지, 어떤 언어로 설명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정부, 다른 민간재단, 시민단체 등과의 협업에 모두 적용된다. 또한 우리는 ‘지원 기관’ 혹은 ‘지원을 받는 단체’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한 용어는 두 파트너 간 권력관계를 규정짓는다. 동등한 관계에 있을 때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건설적인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우리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파트너 단체들이 없다면 재단 역시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예컨대 굴벤키안 재단이 관여하는 ‘모든 성인이 존중받도록’이라는 협력 프로젝트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정신질환자 지원 단체,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 재활 기관, 전과자 갱생 단체, 노숙인 지원 기관 등 서로 다른 영역의 전문기관들이 협력했다. 우리 모두 각자 단독으로 이러한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5년 후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까, 우리가 해결해 낸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협력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변화시키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에 집중했다. 파트너 단체와 우리 재단은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했기에 다양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지원받는 단체’ 같은 표현 바람직 않아
-사회혁신을 위한 금전적 지원 방식으로 사회목적투자 같은 사회적 투자가 확산되고 있다. 굴벤키안 재단이 바라보는 사회적 투자의 역할과 중요성은 무엇인가?
“사회적 투자는 사회 변화를 극대화할 수 있는 도구 중 하나다. 영국 내 많은 재단들이 사회적 투자에 관여하고 있는데 그들은 금전적 수익을 만들어내는 것에 관심 있는 투자자는 아니다. 그들이 집중하는 일은 사회적 투자 시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사회적 투자는 사회혁신을 가능케 하고 좀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사회혁신을 불러오는 다양한 실험적 프로젝트들은 초기 단계에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다. 더욱이 투자자가 원하는 정도의 성과를 명확한 증거로 입증해 보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현재 상황에서 사회적 투자는 초기 단계의 실험적 프로젝트보다 그다음 단계에서 성과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모델이 확장을 필요로 할 때 더 많은 효과를 가져오는 듯하다.”
투자대비 사회적 성과가 우리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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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사회혁신 네트워크 기관 에스아이엑스(SIX)와 공동주최한 2014년 런던 사회혁신 페스티벌. 스프레드아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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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벤키안 재단의 사회적 투자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나?
“예를 들어 굴벤키안 재단은 사회성과연계채권(Social Impact Bond)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실제 투자 대비 수익이 아니라 투자 모델이 좀더 개선된 사회적 성과를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투자한 이유는 사회성과연계채권이 여러 이해관계자와 자금을 모으는 새로운 기법으로 실험해보는 초기 단계이기에 참여하고 투자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새로운 모델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고 작동된다면 이후 더 많은 기관에서 사회적 투자가 확대될 것이다. 우리의 역할은 새로운 모델을 실험하고 다른 여러 플레이어를 찾아 함께 협력하는 데 있다.”
김정원 사회혁신연구소 스프레드아이 공동대표
jungwon@spreadi.org
칼루스트 굴벤키안 재단은?
칼루스트 굴벤키안 재단은 1869년에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난 석유 자본가 칼루스트 굴벤키안의 사재로 만들어진 민간재단이다. 그는 영국과 터키, 오토만 제국 등을 넘나들면서 사업을 벌였고,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1955년 숨지기 전까지 파리와 리스본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정착했다. 1956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칼루스트 굴벤키안 재단이 설립되었고, 파리와 런던에 지부를 두고 있다. 주로 예술과 과학을 매개로 사회복지와 교육 분야에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재단 자산이 2010년 말 기준 2억9000만유로(약 3488억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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