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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13 17:22 수정 : 2015.10.13 17:22

영국 킹스크로스 재생사업 공사 현장과 인공연못. 스프레드아이 제공

[헤리리뷰] 영국 사회혁신 현장을 가다 / 킹스크로스 재생사업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킹스크로스역은 교통의 요충지다. 런던시를 관통하는 6개 노선이 교차하는 지하철역이자, 런던과 영국 북동쪽을 연결하는 기차의 시작점이다. 산업혁명시대인 1850년에 건립된 이곳은 영국 북부 광산과 공장지대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실어 나르는 증기기관차들의 정류장이었다. 하지만 교통 요충지로서의 오랜 명성과는 달리 역 주변은 장기간 방치되어 왔다. 산업시대 주요 물류 수송 수단이었던 기차와 운하가 대형 트럭과 고속도로에 자리를 내주었고, 역 주변의 물류 하적장과 대형 창고들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버려진 공간이 되었다. 역 주변엔 홍등가가 성행했고, 마약상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킹스크로스를 재생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됐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통 요충지에서 버려진 공간으로

그러던 차에, 1996년 영국 정부는 유럽 대륙으로 연결되는 해저 초고속기차 선로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킹스크로스역 바로 옆에 위치한 세인트 팬크러스역이 출발역으로 선정됐다. 영국 정부는 해저 초고속기차 선로 및 역사 건설과 운영을 책임지는 국영기업인 ‘런던&콘티넨털 철도회사’(London and Continental Railway·LCR)에 킹스크로스 주변 지역의 토지와 개발권을 양도했다. 런던&콘티넨털 철도회사가 양도받은 재생 대상지는 킹스크로스역을 시작으로 뒤편 리젠트 운하까지 연결되는 약 1㎞를 포함한 전체 67에이커(약 27만㎡)의 토지와 낙후된 건물들이었다.

최종 선정된 계획서는 단 한 페이지

재생 결정이 내려지자 토지소유권을 갖게 된 런던&콘티넨털 철도회사와 건축허가권 및 관리 감독권을 소유한 관할 구청인 캠던구, 이즐링턴구는 재생 사업에 소요되는 복잡성과 자금 유치의 어려움 등을 고려해 사업기간을 20년으로 결정했다. 2001년 개발사를 공모하자 수많은 사업체가 두툼한 개발계획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이들을 따돌리고 전담사로 선정된 곳은 재생사업의 원칙과 과정을 단 한 페이지에 담아 계획서를 제출한 부동산 전문개발사 아전트(Argent)였다. 아전트가 제출한 계획서엔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 장기간 동안 진행될 복잡성이 높은 사업에 완벽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계획 대신 모든 이해관계자가 재생사업 계획에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정치적인 프로세스를 어떻게 진행할지 원칙과 과정을 제시”한다는 짧은 원칙만이 담겨 있었다.

아전트는 사업을 공모한 땅 소유주, 관할 감독구인 캠던구와 이즐링턴구 및 지역 정치인 등 사업 관련 주요 이해관계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들은 해저 초고속 선로의 1차 공사가 완료되는 2007년까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해관계자가 합의하는 사업의 비전과 원칙을 만들고, 그에 따른 사업의 마스터플랜을 함께 계획하기로 합의했다. 비전과 원칙을 만들기 위해 이들이 함께 던진 첫 질문은 “런던이 경쟁력을 갖춘 세계 일류도시로 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동시에, 지역주민들에게 변화의 혜택이 직접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재생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 사업의 과정과 결과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의 성장기 삶과 그 이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답을 할 수 없다면, 사업의 결과가 어떠한 경제적 효과를 만든다 해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합의가 이뤄졌다.

6년간 353회 미팅…3만여명 참여

사업의 중심 방향이 정해지자 구체적인 원칙이 필요해졌다. 원칙의 수립은 어떠한 건물과 공간을 만들고 어떠한 투자를 받을 것인가 같은 기술적인 상세 내용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사업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해관계자들(땅 소유주, 개발사, 관할구청, 주민)이 동의하고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위한 지난한 소통과 협상이 시작됐다. 개발사와 관할구는 마스터플랜을 만들어나가는 6년의 기간 동안 언제 어디서라도 재생사업에 대한 우려와 이의를 제기하는 어떤 사람, 단체, 기관 등과도 만날 것임을 주요 미디어를 통해 공고했다. 이후 6년간 진행된 소통 과정에는 353회 이상의 미팅이 열렸고 약 3만여명이 참여하였다. 이 기간 동안 열린 모든 종류의 공청회, 워크숍, 길거리 미팅, 이벤트 등의 내용은 개발사와 관할구가 각자 문서화해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했다.

저렴한 임대주택 공급 등 6가지 합의

대부분의 대형 재개발 사업 관련 공청회의 경우 이미 결정된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그 내용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킹스크로스 재생사업의 경우 개발사와 관할구는 사업의 비전과 원칙만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데만 6년여를 보냈다. 이들이 제시한 비전과 원칙도 이미 결정된 사안이 아닌 소통과 협상을 통해 최종 결정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특히 관할구가 진행하는 공청회에서 개발사는 자신들의 원칙 준수가 마스터플랜 수립 과정에 주요한 협상 근거로 사용될 것을 약속했고, 많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민을 비롯한 주요 이해관계자들과 최종 합의된 재생사업의 원칙은 6가지로 요약된다. 저소득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임대주택 공급, 지역주민을 위한 일자리 창출, 런던시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충분한 공공 공간 확보, 산업유산 건물의 보존, 지속가능한 환경 보존 및 지역주민을 위한 충분한 여가 및 교육시설의 공급이었다.

공사 현장에서 버려진 폐기물을 모아 만든 커뮤니티 가든(Skip Garden) 모습. 킹스크로스 제공

100년 이상 내다보고 20%는 공란으로

이렇게 합의된 원칙이 구체화된 마스터플랜은 2006년 비로소 완성되어 건축 허가를 받았다. 최종 마스터플랜에 담긴 내용은 △전체 재생지역의 40%는 공공 공간으로 할당 △2000가구 주택 건설 가운데 42%는 저렴한 임대주택으로 제공 △50개의 오피스 건물 △20개의 문화·산업유산 건물의 보존 △20개의 인도와 차도 △10개의 공공 광장과 공원 등을 포함한다. 이 구체적인 계획들 역시 주요 이해관계자간 합의의 결과물이다. 또한 이 마스터플랜에는 전체 재생 대상 지역의 80%만을 구체화하고 20%는 정의하지 않은 채 유연성을 가질 수 있도록 명시했다. 전체 개발 대상지를 구역으로 나누고 구역별 용도(상업용, 사무용, 주거용 등)와 최대용적률, 준수되어야 할 환경지수 등을 지정했다. 이와 함께 15년이라는 장기 사업 진행 중 계획과 달리 이해관계자들과의 합의사항이 불이행될 경우, 그 이유와 수정 계획 등을 이해관계자들과 꾸준히 소통하는 시간과 과정이 확보되도록 했다. 사업기간의 장기화와 계획의 유연성 확보는 변화하는 부동산 시장 상황에 대처하며, 모든 건물과 공간의 완공 뒤 100년 이상 진행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구역별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개발사를 포함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고민한 마스터플랜의 비전은 100년을 지속하면서 진화하는 지역재생이었다.

2008년 첫삽을 뜨기 시작한 이후 실제 건설 과정에서 개발사의 원칙 준수에 대한 관리감독, 장기간 공사로 인한 지역주민의 고통 해결을 위한 새로운 모임이 발족됐다. 런던시, 런던경찰청, 영국 교통경찰청, 런던 보건 담당, 토지 소유주, 개발사, 관할구청 등의 대표 10여명이 모인 ‘시니어 임팩트’ 모임이 그것이다. 이들은 공사가 시작된 첫해 2주마다 미팅을 진행하면서 주민들로부터 제기된 현실적인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결정하고 빠르게 실행했다. 주민들의 고통 호소와 그에 대한 처리 속도가 충분히 신속해지자 1년이 지난 뒤 미팅은 월 1회, 3년이 지난 뒤 6개월 1회 미팅만을 소집하고 있다.

아파트 옆엔 연못, 그 옆엔 커뮤니티 가든

킹스크로스 재생사업 공사는 2015년 현재 전체 공사계획의 약 60% 이상 진행되었다. 킹스크로스 재생사업팀은 공사 과정 역시 시민들과 공유하며, 그들이 다양한 참여를 할 수 있는 세심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대규모 오피스와 아파트 단지 건설이 진행되는 공사 현장 바로 옆에는 야생화로 둘러싸인 자연정화 인공연못이 있다. 장기간 지속된 공사소음으로 지친 지역 주민과 일터의 시민들은 야생화로 둘러싸인 인공연못에서 수영을 하며 소음 스트레스를 풀어낸다. 인공연못과 건설 현장 사이에는 공사 현장에서 버려진 폐기물을 모아 만든 커뮤니티 가든이 있다. 주민과 시민들이 직접 자신들의 야채를 재배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15년의 재생사업 기간 동안 개발사와 관할구청은 그들의 개발 과정을 뉴스레터 발행과 누리집(홈페이지) 정보공개를 통해 꾸준히 외부에 알리며 소통하고 있다. 이들과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원주민과 전문가들의 목소리 역시 또다른 누리집, 지역언론, 전문가 학술 보고서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다.

도심의 공간을 재창조하는 과정은 갈등과 충돌, 소통과 이해, 합의와 감시의 지난한 반복을 경험한다. 킹스크로스 재생사업이 달라 보이는 것은 이러한 반복의 과정을 꾸준히 기록하고 공개하고 토론하면서 시민사회와 소통하며 유기적으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최종적으로 내려진 의사결정에 굴복한 사람에게도, 또 기뻐한 사람에게도 최소한 어떤 토론과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의사결정이 이뤄졌는지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는 공간과 정보가 제공된다. 도시 재생은 공간에서 살고, 공간에서 일하고, 공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서로의 공간에 대한 권리를 존중하는 과정에서 그 비전과 목적이 온전히 달성된다.

사회혁신연구소 스프레드아이(spreadi) 대표 김정원 jungwon@spread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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