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쟁점진단]북풍과 총선
‘불안의 정치화’는 보수정부에 부메랑 작용할 수도
야당이 사회경제적 의제 차별화 못할때 안보이슈 선거용으로 등장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로켓 발사 이후 정부의 대북정책이 강공 모드로 급변침했다. 화해협력 노선을 견지해온 야당도 개성공단 폐쇄 등 정부의 대북 강경몰이에 부분 가세하면서 우경화하는 경향이 보인다. 정치권의 이런 행보의 기저에는 ‘안보의 보수화’라는 여론의 태도 변화가 있다. 4·13 총선을 앞두고 대북정책이 국내정치, 즉 총선정치에 종속되고 있다는 비판이 드센 이유다.
대북정책에 대한 여론 흐름에서 ‘안보의 보수화’ 경향이 뚜렷해진 것은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다. 2006년이 왜 대북정책 관련 여론의 변곡점이 되었을까? ‘안보의 보수화’ 경향은 국내 선거 정치와 어떻게 결합되어왔는가? 이번 총선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2006년 1차 북핵실험 이후 안보 보수화 뚜렷
2006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북 화해협력 노선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비교적 확고한 편이었다. 진보는 물론 중도, 합리적 보수까지 남북간 대결과 강압정책이 아니라 상호신뢰에 입각한 화해협력 정책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대북정책에 대한 주도권도 진보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균열이 생긴 것은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2003년 이후 한국 사회 주요 이슈와 쟁점에 대해 정기 여론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남북간 화해 협력을 근간으로 하는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은 2006년 하반기 북한의 1차 핵실험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지지 여론이 우세했다. 2005년 5월의 경우 대북 정책 방향에 대해 지지 여론이 70.4%(‘현재 방향 유지’가 17.1%, ‘현재 방향 유지하되 일부수정’ 53.3%)이었고, 북핵실험 직전인 2006년 7월까지도 3명 중 2명 꼴인 68.7%(‘현재 방향 유지’ 10.3%, ‘현재 방향 유지하되 일부 수정’ 58.4%)가 대북포용정책에 대해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북의 핵실험 사태가 터진 직후인 2006년 10월 조사에서는 여론이 급변해 ‘근본적 검토 의견’이 54.3%로 급증하고, 유지 여론은 43.7%로 급락했다. 그 이후 몇 차례의 뒤이은 핵실험, 천안함 사태,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 김정은 치하의 2인자 장성택의 처형 등 일련의 사건들이 터지면서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중시하는 포용정책에 대한 지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포용정책 지속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무너지자 보수진영의 이념공세가 강화되었고 대북문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간 이념 갈등도 격화되었다. 대북정책이 진영갈등의 중심 축으로 떠오르자 선거 정치를 위한 수단화 가능성도 높아졌다. 보수 쪽의 강력한 안보드라이브는 지지층 결집을 위한 확실한 방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한국 사회 전반에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복지와 경제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할 때와 맞물린다. 여론에서 사회경제적 가치 변화를 보여주는 핵심 지표 중 하나가 성장과 분배에 대한 가치 지향인데,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2006년 12월까지만해도 분배(45.3%) 보다 성장(53.5%)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우세했으나 2011년 6월에 이르면 역전되어 성장(38.7%)보다는 분배(56.8%)를 중시하는 여론이 더 높아졌다.(한국일보 조사) 이 시기 여론 지형에서 ‘안보의 보수화’와 별개로 ‘사회경제적 진보화’가 가속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장과 안보는 보수 정부가 선점해온 양대 아젠다다. 그런데 성장주의의 신화가 깨지면서 지지율 관리와 선거 승리를 위해 보수정부의 안보 의존도가 더 커졌다. 안보 아젠다는 사회경제적 진보화에 맞서는 방어막 구실을 한 셈이다.
안보 드라이브, 박근혜 정부 지지율 떠받쳐온 핵심 축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을 떠받치온 핵심 축도 안보 정책이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의 2015년 11월 조사 결과를 보면, 정부 여당이 추진하는 대북정책 전반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54.6%로 부정적 평가(40.6%) 보다 높았다. 이를 다른 분야에 대한 긍정 평가 비율과 비교하면 더 명확해진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44.9%, 노동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35.8%, 부동산 정책은 28.1% 등으로 모두 긍정 평가가 50%를 밑돌았다. 흥미로운 점은 대북정책 평가에서 연령별 양극화가 극심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60대 이상에서는 긍정 평가가 74.9%에 이르고 50대에서도 63.6% 등 고연령층으로 갈수록 긍정 평가가 높았지만 40대 이하에서는 부정 평가가 더 높았다. 대북 이슈가 선거국면에선 이념과 성향, 세대간 편가르기를 유도할 수 있는 적절한 소재임을 보여주는 결과다.
대북정책에 대한 높은 지지에서 비롯된 자신감 때문인지, 박근혜 정부는 주요 고비마다 안보 이슈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왔다. 2013년 2월, 북한이 박 대통령의 취임 2주일을 앞두고 3차 핵실험을 감행하고 개성공단 근로자를 철수시켰을 때 강경으로 일관한 박근혜 정부에 대해 지지 여론이 무려 71%에 이르렀다(한국갤럽 7월 29일 조사). 지난해 사회경제적 위기에 메르스 사태까지 겹치면서 급전직하한 지지율을 끌어올린 건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에 대한 초강경 대응이었다. 대외 갈등으로 국내 갈등을 틀어막는 전통적 전략이 먹힌 것이다.
이번 개성공단 사태에서도 대통령의 대북 강압책에 대해 지지 여론이 높았다. <중앙일보>의 15일 조사에서는 정부의 개성공단 중단 조처에 대해 찬성 54.8%, 반대 42.1%로 찬성이 우세했고, 한반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해서도 찬성(67.7%)이 반대(27.4%)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 14일 연합뉴스와 한국방송(KBS)이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발표한 조사에서도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 조처에 대해 ‘잘한 일’이라는 응답이 54.4%로, ‘현재처럼 가동해야 한다’는 답변(41.2%) 보다 13.2%포인트 높았다. 심지어 국내 일각에서 제기된 핵무장론에 대해서도 핵무기 독자 개발 또는 미군 전술핵의 남한 재배치에 대한 지지(52.5%)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41.1%)보다 높았다. 대통령의 강경한 안보드라이브는 이러한 여론지형에 따른 자신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사회경제적 의제의 차별화 없어 안보 이슈 더 부각
이번 선거는 어떨까? 4·13 총선은 대통령 임기 4년차에 치러지는 선거로 사실상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와 심판의 성격이 짙다. 임계치에 이른 사회경제적 불안과 불만이 총선 결과로 이어질 경우 박 대통령은 심각한 레임덕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남은 임기동안 지지율 관리 및 정국주도권 확보를 위해서 안보 불안을 극대화하여 사회경제적 불안을 덮는 ‘불안의 정치화’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보수정부가 안보 이슈를 부각시키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보수층 결집 효과 때문이다. 유권자 지형을 분석해보면 보수층 내에서도 가장 결집력이 강하고 충성도 높은 층이 안보 보수층이다. 이 ‘묻지마 지지층’을 중핵으로 약 40%에 이르는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안보 불안을 느끼는 중도층 일부를 끌어오면 총선에서는 압승이 가능하다. 여기에 야당에 대한 깊은 실망감과 분열 상황으로 대안 부재 상황에서 진보개혁 성향층의 기권 가능성이 제법된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박근혜 정부의 총선 전망은 더욱 밝아진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외곽 싱크탱크인 <더미래연구소>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유권자 지형조사에 따르면, 안보를 지상과제로 여기는 반공보수층은 사실 전체 유권자의 10%가량에 불과하다. 대체로 60대 이상 고연령층이자 박정희 향수층이다. 보수를 묶는 중심 가치로서 안보의 의미가 약화되고 경제적, 사회적 이해와 가치가 중요해지고 있다. 게다가 경제적 이해를 중시하는 신보수층 등 보수층내의 다양한 분화를 고려할 때 안보 이슈의 효과는 추세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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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이라는 사회경제적 의제가 쟁점 이슈가 된 2010년 지방선거에서 88만원세대가 투표참여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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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요 선거에서 안보 이슈가 핵심 변수로 작용한 경우는 사회경제적 의제에서 여야가 차별화되지 못했을 때다. 2012년 대선을 실증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핵심적 기여를 한 이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북방한계선(NLL)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여권의 공세로 시작된 ‘북풍’이었다. 당시 보수진영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회경제적 의제에서 여야간 차이가 모호해졌고, 대신 엔엘엘 등 안보 이슈가 핵심 쟁점으로 등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천안함 사태라는 초대형 이슈 대신 무상급식 등 사회경제적 의제가 선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무상급식을 놓고 여야간, 진보 보수진영간 논쟁이 확산되면서 투표선택의 핵심 기준으로 작용했다. 유권자들에게는 추상적인 안보 이슈보다 자신의 삶의 문제와 직결된 사회경제적 의제가 훨씬 중요하다. 특히 삶의 불안과 불확실성이 깊어질수록 민생관련 의제의 중요성은 더 강력해진다.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있고 차별화된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이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한편, 안보 이슈를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는 것은 보수정부에게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출구없는 긴장상황이 지속되면 보수정부가 안보에서조차 ‘무능’하다는 비판이 쏟아지게 된다. 특히 안보 불안이 경제 불안으로 전이되고 가속화될 경우엔 견고하다고 여겨졌던 보수층 내부의 균열 위험도 뒤따른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갈등, 외국자본의 급격한 이탈 등 ‘코리아 리스크’의 현실화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 ‘불안의 정치화’가 보수정부에게 치명적 부메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국민에게는 더 끔찍한 재앙이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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