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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아 이사(오른쪽 끝)가 이끄는 모토로라 여성사업회의는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강연, 멘토링 등 여성 인력들을 키우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 이종근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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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여성은 나의 힘’ ②
이향림(44) 볼보코리아 사장은 지난해 이 회사 재무과장으로 입사한지 7년, 회사생활 17년 만에 ‘직장인의 꿈’인 최고경영자로 취임했다. 유학 한번 가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서 자동차업계 최연소, 첫 여성 최고경영자인 그의 경력은 특이하다. 95~97년이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모유수유실 설치·자율시간 근무제 도입
임원육성책 마련도…관리직만 배려 한계 이 사장은 당시 10년 동안 일했던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을 떠나 전업 주부 생활을 했다. “저는 운이 좋았죠. 한국 기업이라면 아기가 있고, 경력이 3년이나 비는 여성을 경력직으로 채용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다만 그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신문을 읽고 업무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 사장 같은 기혼 여성들은 외국계 기업의 핵심 인력이다. 80년대 이후 고학력 여성들의 사회 진출 자체는 부쩍 늘어났지만, 많은 이들이 결혼과 육아의 문턱에서 좌절했다. 하지만 외국계 기업들만큼은 이 ‘엄마들’을 홀대하지 않았다. ‘인재 사관학교’로 불리는 한국 피엔지는 체계적인 여성 인력 지원정책으로도 유명하다. 피엔지는 여성 직원이 임신했을 경우 월 1회 건강검진 휴가를 제공하고, 출산 뒤 남·녀 직원의 휴직 사용을 적극 장려하며, 사내에 모유 수유실을 마련해 놓았다. 그뿐 아니다. 사원이 출장이나 사외 교육으로 집을 비울 경우 탁아비용을 지원하고, 사내 커플이나 남편이 해외로 발령이 날 경우 부인도 현지 피엔지 지사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성들이 크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피엔지의 여직원 비율은 40%, 부장 이상 간부급의 여성 비율은 32%에 육박한다. 최근에는 상당수 회사들이 ‘여직원회’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본격적인 여성 지원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토로라코리아의 여성사업회의(Women’s Business Concil)는 매년 회사로부터 3천만원의 예산을 지원받고, 사업 실적을 임원회의에 보고하는 정식 기구다.
지난 3월에 출범한 이 조직의 목적은 ‘더 많은 여성들을 채용하고, 이들의 회사 생활을 도와주며, 우수한 이들을 리더로 양성한다’는 것. 회사의 든든한 지원 아래 임정아(34) 이사가 책임을 맡아 여직원들과 주요 임원들이 정기적으로 점심 모임을 갖고 멘토링으로 결연하도록 한다. 여성들만을 위한 캠퍼스 리크루팅도 진행중이다. 한국피엔지도 이와 유사한 ‘여성들을 돕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여성들을 겨냥해 유연한 근로 제도를 도입한 회사들도 있다. 한국피엔지는 일찍 출근하면 일찍 퇴근하는 자율시간 근무제도를, 한국아이비엠은 일주일에 3일까지 집에서 일할 수 있는 재택 근무제도를 각각 운영중이다. 한국엠에스디는 한발 더 나아가 출산 여직원들이 1년 동안 1시간 먼저 퇴근할 수 있도록 하는 ‘엄마 우대’ 기업이다. 일부 다국적 기업은 여성 임원의 목표 비율을 정해놓거나, 임원 후보 3배수 가운데 최소한 한명을 여성으로 선정하는 적극적인 여성 임원 육성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모토로라 임정아 이사는 “글로벌 기업들은 성적 소수자, 유색인종, 장애인 등 다양한 인적 구성이 조직에 주는 긍정적 효과를 믿는다”며 “우수 여성인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도 이런 차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국계 회사라고 모두 특별한 여성 우대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아니다. 인력의 생산성을 따져 적은 인원으로 운영되는 대부분의 외국계 회사들은 이런 정책을 펴기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론진의 신미애(38) 부장은 “대다수 외국계 기업은 여성 직원을 우대하기보다는 성과 중심의 인사평가로 여성들 역시 똑같은 잣대를 적용받는다”고 지적했다. 여성에 대한 배려가 주로 관리직에만 적용되고 있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여직원의 결혼과 출산을 당연시하고, 가족과의 시간을 철저히 보장하는 기업 문화가 우수 여성 인력의 활용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국내 기업처럼 기혼여성을 은연 중에 차별하지 않는 문화가 눈에 보이는 지원책보다 더 큰 ‘여성의 힘’이 되고 있는 셈이다. 월마트코리아의 박찬희(48) 상무는 “우리 회사에서는 당당하게 ‘아이 생일잔치 때문에 일찍 가겠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며 “잘 놀고 가족과의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것이 글로벌 기업의 상식”이라고 전했다. 한국 엠에스디의 이애희(43) 기술이사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89년 면접을 봤던 국내 기업은 외국에서 공부했고, 결혼을 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을 꺼려했다”며 “그동안 일했던 외국계 회사들은 내가 아이 셋을 낳으며 직장과 일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장을 열어줬다”고 말했다.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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