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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5 19:26 수정 : 2005.09.05 19:26

10대그룹 주력기업 연도별 여성 신입사원 비중 추이

“술자리 자주하냐”가 리더십의 기준
나이중시등 기업문화 여전…여성불리

주요기업 여성인력 활용 실태

국내 10대 그룹 소속 대기업에서 일하는 이진형(가명) 차장은 요즘 고민이 많다. 입사 17년차 여성 간부인 그는 직장생활 초기부터 남들이 꺼리는 ‘티 안나고 주변적인 업무’를 맡는 일이 많았지만, 성실성 하나로 차장 승진까지 성공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핵심부서 경력이 없다 보니 관리직에 오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경력관리가 안 된 거죠. 주요 부서를 두루 돌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지 못했으니 고과성적 자체가 아무리 좋아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습니다.”

 다른 대기업에 다니는 김수현(가명) 과장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는 여성이 드문 영업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왔다. 미혼인 윗세대 여자 선배들과 달리 아이를 낳으면서 가정과 직장 모두를 병행하기 위해 남들보다 두배, 세배 열심히 살았다. “올라갈수록 여자들이 크는 것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이 느껴져요. ‘능력이 조금 떨어져도 큰 일은 남자에게 맡기는 게 안전하다’는 인식이 여전한데다, 남자들끼리는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네트워크가 엄청 세잖아요.” 김 과장은 “내가 좌절하면 자라나는 여자 후배들의 길이 막힐까봐 더욱 열심히 일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의 여성 고용은 꾸준히 늘어왔다. 1980년대 초반 대우그룹의 여성 공채를 시작으로 상당수 대기업들이 ‘주부사원 공채’ ‘대졸여성 공채’를 시도했다. 특히 89년 남녀고용평등법의 시행은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직장을 다니던 여성들은 이때를 ‘노골적 차별이 없어지기 시작한 분수령’으로 기억한다. 93년 삼성 이건희 회장의 ‘우수 여성인력 활용’ 방침처럼 대기업 총수의 여성인력 양성 의지가 촉매가 되기도 했다. 2001년 열명에 한명꼴이던 10대 그룹 주력기업의 대졸 여성 신입사원 비율이 올해 상반기에는 다섯명에 한명꼴로 늘어난 것도 그 성과다. 그러나 여성인력의 양적 증가가 질적 발전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유능한 여성 중에서도 간부나 임원으로 올라간 이는 드물다. 육아·보육 등 여성의 사회활동을 뒷받침할 사회적 인프라의 부재와 함께 기업 안에서 여성의 발목을 잡는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역시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게 그들의 증언이다.

 인사 평가상의 구조적 차별이 대표적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상당수 대기업에서 ‘대리 승진에 여성은 7년, 남성은 4년’이라는 공식이 공공연히 적용됐다. 80년대 초반에 입사한 10대 그룹 소속 여성 부장은 “남자들은 군 경력을 인정받아 3년이 빠르다고 했지만 군 면제인 남자들도 4년 만에 승진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이런 노골적인 차별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나이를 중시하는 기업문화 탓에 “연장자인 남자 아무개씨를 위해 이번에는 여자인 당신이 양보하라”는 식으로 여성들에게 낮은 점수를 주는 관행은 여전하다. 고위직 승진 심사 때 중요하게 여겨지는 ‘리더십’ 역시 ‘남성들에 의한, 남성들을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입사 20년차인 대기업의 한 여성 부장은 “임원 승진 심사 때 부서원들을 이끄는 리더십을 ‘술자리 자주 하냐?’는 식으로 물어본다”며 “새벽 2~3시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는 잘 안 가지만 내 방식대로 부서원들을 잘 통솔하는데 야속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제조업은 일의 특성상 여성 간부와 임원이 적더라도 서비스업과 유통업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여성 임원 현황에서 업종 간 차이는 거의 없다. 한 예로 대한항공은 전체 객실승무원 3800여명 중 여성이 86%지만, 회사 전체로 여성 임원은 단 한명뿐이다. 대기업 여성 고용의 역사가 짧은만큼 통상 20년 이상의 근속 연수를 필요로 하는 임원들은 외부 전문가 그룹에서 발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내부의 고졸·비명문대 출신도 종종 임원으로 승진하는 남성들과 대조적이다. 기업들이 “직접 여성들을 키우지 않다가 뒤늦게 ‘토큰 피메일’(대외 홍보용으로 임명하는 여성 고위직)을 임명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은 전체 1100여명의 임원 중 여성이 14명인데, 외부 영입이 아닌 순수 내부승진은 이건희 회장의 두 딸을 제외하고는 극소수다. 여성 직장인들은 “공채 출신 여성의 임원 승진을 앞둔 지금이 진정한 여성 임원 시대의 시작”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이런 지적에 수긍하면서도 “남녀차별은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 문제”라고 항변한다. 이들은 또 육아·출산 등 복지 분야에 정부 투자가 전무했던 과거에는 여성들을 채용하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고 말한다. 10대 그룹 소속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80년대 중반부터 여성 공채를 시도했지만 불과 1~2년 만에 출산 등을 이유로 대부분 그만뒀다”며 “삼성 등 다른 곳에서도 여비서 공채, 여성으로만 이뤄진 조직 신설 등 다양한 실험을 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했다. <유리천장 깨뜨리기-관리직 여성의 일과 삶>이라는 책의 저자인 한국노동연구원의 전병유 연구위원은 “여성들은 출산 등 개인적인 위기를 극복한 뒤에도 조직 안의 ‘유리천장’을 극복하지 못해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핵심부서 진출을 가로막는 ‘유리벽’ 역시 여성의 고위직 진출에 큰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여성들의 감수성과 유연한 소통능력, 창의력 등을 높이 평가해 여성인력 활용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삼성과 케이티의 탁아소 운영, 엘지의 수유실 설치 등 선도기업들의 노력은 빠르게 퍼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성인력의 적극적 활용은 기업을 넘어선 국가적 과제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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