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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인 이카키 지역에 있는 섬유공장 인펙스에서 청바지를 만드는 노동자들. 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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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메데인에서 만난 콜롬비아
<한겨레> 국제부 박민희 기자는 지난 10월중순 한국언론재단이 지원한 남미 지역 연수프로그램을 통해 콜롬비아 메데인을 방문했다. 취재한 내용이 지면으로 소개되었으나, 박민희 기자는 기사외에 취재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별도의 [취재기] 형태로 보내왔다.
메데인은 콜롬비아 중부 안티오키아주에 있는 해발 1500m의 고원 도시다. 메데인하면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전세계적으로 악명을 날렸던 마약조직 '메데인 카르텔'의 본거지로 잘 알려져 있다. 또 뚱뚱한 인물과 동물들 그림으로 유명한 프란시스코 보테로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진 콜롬비아의 현대사와 이 나라의 문화적 저력과 매력, 두 가지 모습을 모두 안고 있는 도시다.
이 자리에 지금과 같은 도시가 세워진 것은 1616년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헤레라 이 캄푸자노에 의해서다. 적도에서 멀지 않지만 고원 지대에 있어 연중 20℃정도의 날씨가 유지돼 '영원한 봄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도시 외곽에는 화훼단지와 커피 산지가 있다.
커피 농업과 마약산업을 제외하면 사실 별다른 산업이 없는 콜롬비아에서 섬유, 철강, 식품, 음료, 화학산업, 의약산업, 석유정제업, 꽃과 커피 등 농업이 발달한 경제 중심지로 유명하며, 이 도시의 막강한 기업가들과 정치인들 가운데 이 도시 출신들이 많다.
한국언론재단이 지원한 남미 지역 연수 덕분에 10월 중순 메데인에 갈 수 있었다. 콜롬비아 부통령 공보실에서 주선해준 군용기를 타고 새벽에 수도 보고타를 출발했다. 굉음이 귓가를 때리는 가운데 한시간을 날아가자 산악지대 한가운데에 도시가 나타났다.
1. 섬유산업과 콜롬비아-미국 FTA
쾌청한 날씨 속에 시 외곽 이타기 지역의 공단에 있는 대형 의류공장 인펙스로 향했다. 노동자들이 하루 2만벌의 청바지와 면바지를 만드는 곳이다. '리바이스'와 '갭' 등의 상표를 달고 미국 시장으로 팔려나갈 바지들이다. 이 회사 사장인 하이메 하라미요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메데인에는 남미 최대 규모의 의류산업이 있었다. 지금은 중국이나 베트남 등 아시아 업체와 경쟁이 안돼 업체들이 많이 빠져나갔다. 도대체 중국 기업들이 어떻게 그 가격으로 물건을 만드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다. 마약과의 전쟁이 한창 이 도시를 벌집 쑤신 듯 만들었을 때는 바이어들이 무서워 이곳에 오지를 못했지만, 그래도 바지를 끊임 없이 만들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마약조직끼리의 전쟁도 사라지고 치안도 많이 나아진 상황이다.
의류산업은 농업을 제외하면 콜롬비아의 주요 산업중 하나다. 남미의 제조업 중 대표적인 것이 미국 시장을 겨냥한 섬유산업이고, 미국도 남미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미국가들에 관세혜택을 주고 있다.
콜롬비아는 2006년 12월까지 관세 면제 혜택을 받고 있는데, 최근 미국과 FTA 협상이 진행되고 있고 올해 안에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기업들은 관세 감면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협상이 체결되지 않을 경우 17.5%의 관세를 내야 한다. 그래서 기업가들은 미국과 FTA 협상을 적극 지지한다. 그러나, 농수산물 분야 개방에 대한 불안감이 크고 FTA 반대도 만만치 않다.
2. 페르난도 보테로
청바지 공장을 빠져나와 보테로 박물관으로 향했다. 원래 이곳은 안티오키아주립 미술관이지만 이곳 출신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페르난도 보테로(74) 가 자신의 조각작품과 회화 작품들을 이 박물관과 박물관 앞 광장에 기증해 시민들이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하면서 보테로 박물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가의 작품이라는 무게감보다는, 뚱뚱한 인물과 동물들의 친근한 모습에 미소가 지어지는 작품들 앞에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산책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보테로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미술가 중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온통 비현실적일 정도로 기괴하며 뚱뚱하며, 거대한 뺨과 얼굴 안에 작은 눈, 코, 입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보테로는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작품이 팔리는 화가로 꼽힌다. 그는 부유한 가족들의 초상화, 누드로 서 있는 거대한 몸집의 남녀, 뚱뚱하게 살찐 과일들, 뚱뚱한 콜롬비아 장군과 정치가들의 모습으로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들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구겐하임 미술관, 안티오키아 주립미술관 등에 많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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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인 시내 성당앞에 있는 조각공원, 보테로가 기증한 조각상들 앞에서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거나 기념사진을 찍는다. 예술작품을 시민들이 부담없이 즐기도록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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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인에서 가난한 노점상의 아들로 태어나 투우사 양성학교를 졸업한 뒤 뒤늦게 미술 수업을 받은 보테로는 고국을 떠나 수십년 동안 뉴욕과 파리에서 살고 있다. 내전 상황 속에서 여러 번 납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나는 가장 콜롬비아적인 콜롬비아 화가다. 내가 47년 동안 외국에 나가 살고 있지만, 한번도 뉴욕이나 파리를 그린 적은 없다. 지금도 다시 고향에 돌아가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평화로운 콜롬비아에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의 작품 속에 표현된 모든 인물과 일상의 모습을 콜롬비아인과 콜롬비아의 모습이라고 한다. 콜롬비아의 유명 인물들도 뚱뚱하게 과장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비평가들은 그가 소재를 이렇게 뚱뚱하게 표현하는 것은 주제와 상황을 풍자하고 비꼬는 의도라고 설명하지만, 보테로 자신의 설명은 "예술가는 이유를 알수 없이 어떤 형태에 끌리기도 한다. 직관적으로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비평가들은 그의 모든 작품에 콜럼비아에서 보낸 어린시절과 콜롬비아 현실에 대한 사회적 발언이 들어가 있다고 평가한다.
보테로는 최근 뚱뚱한 인물화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현실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을 하는 작품들을 그리고 있다.
40년 동안 콜롬비아를 괴롭히고 있는 잔인한 내전, 마약조직들, 마약과의 전쟁 등 자신의 고국이 겪고 있는 참혹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납치, 살인, 장례행렬, 차량폭탄 등 내전의 참혹한 모습들을 그린 이 작품들을 이용해 돈을 벌 생각은 없다며, 작품 전체를 콜롬비아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2005년에 그가 발표한 작품은 미군들이 이라크 바그다드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이라크인들을 고문, 학대한 사건에 대한 "분노와 충격"을 표현한 연작 50점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런 역사를 잊지 않도록 이 작품들도 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3.파블로 에스코바르:마약산업과 마약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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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테로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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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인 안티오키아 박물관에서 보테로의 그림들을 보다가 어떤 그림에 눈길이 멈췄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을 그린 그림이다. A4용지 정도의 크기에 뚱뚱한 남자가 온몸에 피를 흘리며 지붕 위에 서 있다.
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1949.1~1993.12.2)는 바로 메데인 출신의 마약왕이다. 역사상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야심만만하고 강력한 마약상으로 알려진 그는 마약조직 메데인 카르텔을 운영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포브스>는 메데인 카르텔이 전세계 코카인 시장의 80%를 통제하고 있다며 에스코바르가 세계 7대 갑부라고 보도했다.
70년대부터 마약 밀매를 시작해 75년 마약상으로 유명했던 파비오 레스트레포를 살해하고 그의 조직을 접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년대 메데인 카르텔이 번창하면서 미국,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로 들어가는 코카인의 대부분이 그의 조직을 통해 거래됐다. 그는 페루나 볼리비아에서 코카를 들여와 유통시켰다. 에스코바르의 조직은 아메리카 전역과 아시아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에스코바르는 관리와 판사,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었고, 말을 잘 듣지 않는 부하들이나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직접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살해한 사람이 수백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이 아니면 납' 즉 뇌물을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방식으로 관리들을 상대했다. 콜롬비아 대선후보나 정치인들이 그로부터 대선자금이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1990년 대선 후보 3명 살해사건, 아비앙카 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 보고타 시내 빌딩 폭파사건 등 테러사건으로 악명을 떨쳤다. 대법원 판사 절반이 살해된 85년 좌익게릴라들의 콜롬비아 대법원 공격에도 그가 간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메데인 카르텔은 라이벌인 칼리 카르텔과 피 튀기는 마약전쟁을 벌였다.
메데인 카르텔은 비행편대와 선박, 호화판 차량, 사병조직을 거느리고 광대한 땅도 소유하고 있었다. 마약 유통을 통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현금이 들어왔고,. 전성기에 메데인 카르텔은 매년 300억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콜롬비아 정부는 에스코바르를 적으로 여겼지만, 메데인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는 로빈 훗이요 영웅이었다. 에스코바르는 빈곤층들을 상대로 로빈 훗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메데인 축구장 건설에 돈을 내놓았고, 소규모 축구팀도 후원했다. 빈민층에게는 돈도 나눠줬다. 에스코바르가 오랫동안 잡히지 않았던 것은 메데인의 빈곤층이 그에게 은신처를 주는 등 그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보테로의 그림에 표현된 에스코바르의 모습도 악당보다는 순교자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미국의 포위망이 좁혀들어오고 라이벌 칼리 카르텔과의 경쟁과 암살위협이커지면서 그는 타협을 시도했다. 1991년 에스코바르는 과거에 저지른 모든 폭력과 테러를 끝내겠다고 선언하고 정부가 그의 신병을 미국에 인도하지 않겠다고 보장하는 대가로 5년 동안 감옥에 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사실상 저택 수준인 호화감방을 짓고 5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마약밀수를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밖으로 나다니고 사람들을 저택으로 불러 만난다는 주장이 계속 나왔고, 언론에선 그의 호화 감방생활을 비판하고 그가 계속 살인을 저질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92년 정부가 그를 다른 감방으로 옮기기로 하자 그는 탈옥했다.
92년 미국 델타폭스 특공대가 에스코바르 체포 작전에 나섰다. 그들은 콜롬비아 특수부대 Search Block을 창설해 훈련시켰다.
동시에 라이벌 칼리 카르텔 등이 후원하는 민병조직인 '파블로에스코바르에게살해된사람들의모임(Los Pepes)'도 메데인 카르텔에 대한 복수전에 나섰다. 이 싸움에서 메데인 카르텔 조직원과 친지 300명 이상이 학살됐고, 메데인 카르텔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과 콜롬비아 특공대가 이들 로스 페페스의 복수전에 정보를 주고 일부 요원을 투입시키는 등 간여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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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에스코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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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2일 에스코바르가 콜롬비아 경찰에 살해됐다. 도청팀이 그가 메데인의 중산층 지역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에스코바르와 Search block 부대원들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에스코바르는 주택가 지붕 위에서 도망치다 다리, 등, 귀 뒤 등에 경찰의 총을 맞고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에스코바르가 죽자 메데인의 빈곤층 가운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에스코바르가 숨지자 메데인 카르텔은 분해됐고, 코카인 밀수는 라이벌 칼리 카르텔에 장악됐다. 1990년대 중반 칼리 카르텔 두목들도 정부 소탕작전으로 살해되거나 체포됐다.
2006년 10월 28일 그러니까 우리 일행이 콜롬비아에서 돌아온 뒤 며칠 뒤에 에스코바르의 묘지가 발굴되고 주검도 공개됐다. 묘지 발굴에 반대했던 에스코바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지 이틀 뒤인 이날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조카가 무덤에 묻힌 것이 정말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맞는지 확인하고, 친자확인 소송을 해결하기 위한 DNA 체취를 위해 무덤 발굴을 요청했다. <엘 티엠포>는 에스코바르의 전 부인 마리아 빅토리아가 그 과정을 비데오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보도했다.
보테로가 그린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을 비롯해 2001년 드라마 <블로우>, 마크 보우덴의 책 <킬링 파블로>, 톰 클랜시의
도 모두 에스코바르를 주인공으로 다룰 정도로 에스코바르는 문화적 소재로도 남아 있다.
에스코바르 추격작전에 미국이 개입한 것처럼 콜롬비아가 내전과 마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40년 동안 미국과 콜롬비아는 계속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미국은 자국에서 유통되는 마약의 대부분이 콜롬비아 마약조직을 통해 들어온다는 데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콜롬비아와 미국은 계속 '마약과의 전쟁'을 축으로 연결돼 있고, 콜롬비아 정권은 수십년 동안 미국의 지원과 압력 속에서 마약조직 소탕작전을 벌여왔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콜롬비아 마약과의 전쟁을 테러와의전쟁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내전은 1964년 좌익반군들의 반란으로 처음 시작됐다. 1940년대 40만명을 희생시킨 보수파와 자유파의 내전에 이어 60년대부터 좌파 반군과 정부군, 반군에 맞선 우익 민병대가 충돌하며 50년 동안 온 나라가 폭력의 악순환에 빠졌다. 여기에 80년대부터 남서부 안데스 지역에서 마약재배가 확산됐면서 마약조직들이 무장세력들과 손을 잡으면서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혼란이 찾아왔다. 90년대말에는 무장 게릴라가 전국토의 40%를 장악했고, 수도 보고타에도 차량폭탄 공격과 납치가 일상화됐다. 반군들은 '자금' 마련을 위해 민간인을 납치해 몸갑을 받아내는 '산업'을 창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2년 반군과 마약조직 문제의 강력한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우리베 정권은 좌파 반군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와 민족해방군(ELN)에 대한 강력한 소탕작전을 벌여 이들을 산악지대로 몰고 있다. 우리베 정권은 7년 전부터 부시 행정부가 지원하는 '플랜 콜롬비아' 작전을 통해 이전 정권보다 훨씬 강력한 소탕작전에 나섰다.또 최근 비교적 온건한 민족해방군과의 평화협상도 시작했다. 부유층들의 자위조직으로 조직됐으나 반군과의 전쟁과정에서 인권유린을 일삼았던 우파 민병대 대원들에 대해서는 사면과 사회복귀 프로그램을 통해 3만명을 무장해제시켰다.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는 치안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범죄율이 절반 이하로 줄었고, 납치 위험 때문에 돌아다닐 수 없던 도로들도 다닐 수 있게 된 곳이 많으며, 광업, 소매업 등을 중심으로 외국 투자자금도 급증하고 있다. 당연히 콜롬비아 내부에서 중산층을 중심으로 그의 정책에 대한 지지가 높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비싼 값을 주도 마약을 구매, 소비하는 광대한 계층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에서 콜롬비아 마약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콜롬비아 일간 <엘 티엠포>의 카를로스 페르난도 갈란 파촌 정치부장은 "미국과 유럽의 마약 소비가 계속되고 불법으로 묶여 있는 한 콜럼비아의 마약산업도 계속된다. 우리베 정부가 강공책을 통해 반군, 마약조직을 소탕하고 있지만, 마약의 생산, 판매, 유통을 통해 엄청난 자금이 콜럼비아로 유입되고 이익을 얻는 계층이 많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런 구조가 남아 있는 한 우리베 정권에서 게릴라, 민병, 마약조직이 약해지긴 하겠지만, 이 문제가 근절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년에 39억달러가 마약밀매를 통해 콜롬비아로 들어오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최근 콜럼비아가 기록한 연 5.5% 경제성장 가운데 1%는 마약밀매가 기여한 부분이라고 은 파촌 부장은 말했다.
빈곤층부터 고위층까지 모두가 마약 자금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마약자금은 중국산 제품등으로 세탁돼 들어오기도 한다. 콜롬비아 사회 전체에서 누구도 마약 관련 자금에서 자유롭지 않다.
4 .산토도밍고 코뮤나스와 메트로 케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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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네인의 산동네와 시내 도심을 잇는 메트로 케이블, 아래로 산동네인 산토도밍고 코뮤나스가 보인다.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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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인의 북쪽 지역에는 무허가 벽돌집들이 산자락을 가득 메우고 들어 앉았다. 90년대까지 메데인 카르텔의 텃밭이었던 '코뮤나스' 지역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산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빨간 벽돌집들 뿐이다. 마약지대의 유혈사태를 피해 도시로 올라온 피난민들이 쓰레기 더미 위에 지은 이 곳은 5년 전까지만 해도 마약 갱단끼리의 전면전과 살인청부로 외부인들은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우리 일행이 찾아간 산토도밍고 코뮤나스 지역은 새로 정비된 도로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과일을 파는 노점상, 휴일을 보내는 주민들로 평화로웠다. 메데인 시당국은 철저하게 버려진 무법천지였던 이 지역을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2년 전 산 아래와 산동네를 잇는'메트로 케이블'을 건설해 1100페소(500원)의 저렴한 가격에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산 정상까지 5㎞ 구간을 잇는 이 지역교통 케이블카는 산동네 주민 15만명의 삶에 혁명을 가져왔다. 시 정부는 이와 함께 2330억페소(약 1100억원)을 들여 도로 재정비와 직업교육, 일자리 알선, 주거환경 개선 등에 투자했다.
메데인시 국제협력담당관인 다니엘 마우리치오 바스케스는 "사람들이 일을 하고 더 나은 삶을 누릴 기회가 없었던 게 이 지역에 폭력이 끊이지 않던 원인이었다. 똑 같은 교육과 일할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이전에 산토도밍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메데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메트로 케이블이 건설되면서 상황이 스스로를 메데인 사람이라고 느낀다. 이 지역에는 몇 년 전까지 폭력 조직들 문제가 심각했지만 지금까지 과거 조직원 5천명이 재사회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산토도밍고에 살았다는 주민 루벤 다리오 마르티네스(26)는 "최근 상황이 매우 좋아졌다. 이전에는 총싸움과 폭력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범죄도 사라졌다. 시내까지 출퇴근하는 시간도 절반으로 줄었고 이 지역 안에서도 건설공사나 청소 등 일자리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는 몇번씩 버스를 걸어타야 시내의 철공소에 출근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메트로 케이블을 타고 20분 만에 출근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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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폭력조직의 근거지로 악명 높았다는 메데인 산동네 산토도밍고 코뮤나스의 아이들. 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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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도밍고 지역에 있는 동안 `때마침' 비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치면서 안전을 고려해 메트로 케이블이 2시간 정도 운행을 멈췄다. 그동안 거리에 나가 아이들이나 주민들과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스스럼없이 다가오던 아이들, 길에서 사탕수수 주스를 팔던 아저씨, 부통령 공보관실에서 나왔지만 하루 동안 콜롬비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얘기해준 이냐시오 그레이펜스타인 홍보팀장과 아나마리아 카발레로, 청바지 공장에서 일하던 메데인 사람들….의 모습이 지구반대편으로 돌아온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나라에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고 지금도 그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현재 같은 콜롬비아 정부의 강공책에 빈부격차 해소와 일자리 창출, 토지개혁 등 근본적인 사회변화가 더해져야만 이들의 뿌리 깊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콜롬비아의 고통은 미국의 마약문제와도 얽혀 있기 때문에, 미국이 마약 사범을 인도하라거나 고엽제를 마약재배지에 뿌리라고만 닥달하는 대신 자국 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산토도밍고에서 떠날 때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갠 뒤 거짓말처럼 깨끗한 하늘이 왔고, 아이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콜롬비아의 고통과 전운, 마약과 부패도 그렇게 거짓말처럼 사라지기를, 활짝 웃고 있는 이 아이들이 더 많은 희망과 기회를 가지고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메데인을 떠났다.
<한겨레> 박민희 기자 min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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