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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 23일 촬영한 피노체트 자료사진.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맑시스트 대통령을 유혈혁명으로 몰아냈다.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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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칠레에서는 수만명이 고국을 등진 채 망명자 신세로 전락해야 했다. 피노체트의 학살 대상은 칠레 국민으로 국한되지 않았으며 특히 미국인 기자 겸 영화제작자 찰스 호먼 살해사건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언제까지 계속될것만 같았던 피노체트의 악행은 1988년 집권 연장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부결되고 이듬해인 89년 12월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파트리시오 아일윈 후보가 당선되면서 종언을 고한다. 19980년 런던서 체포되며 몰락 하지만 피노체트는 1990년 3월 권좌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이 생긴다면 다시 쿠데타를 하겠다"고 호언하는 등 한동안 독재자 행세를 계속했다. 피노체트는 1980년 실시한 개헌에서 자신이 1998년까지 군 총사령관직에 머물고 그 이후에는 종신 상원의원직을 보유하도록 규정해 놓아 퇴임 이후까지 대비해 놓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피노체트의 몰락은 1998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전격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스페인 사법 당국이 피노체트의 재임 기간에 스페인인이 살해된 것과 관련해 발부한 영장이 효력을 발휘한 때문이다. 2000년 3월 영국에서의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피노체트는 2002년 종신 상원의원직에서 물러났다. 수많은 단체로부터 인권유린 혐의로 기소된 피노체트는 재판정을 피하기 위해 치매나 골절, 기관지염 등 다양한 질병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4년에는 피노체트의 미국내 비밀계좌가 폭로됐고 같은해 말 칠레 법원은 피노체트를 인권유린 혐의로 전격 기소했으며 지난해 1월부터는 가택연금과 석방을 반복해왔다. 또한 지난해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이 박탈됐고 그의 부인과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은 탈세 공모 혐의로 체포됐다. 자신을 공산주의에 대한 십자군으로 자처했던 피노체트지만 그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 "내가 지나쳤다면 신이 용서할 것"이라고 물러서야 했으며 이후에는 측근들에게 "죽고 싶다"며 자괴감을 표하기도 했다. 결국 피노체트는 지난달 "정치적 책임"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어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야 했으며 91세 생일을 맞은 지 얼마안돼 눈을 감고야 말았다. 피노체트는 집권 과정에서 기술관료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민영화를 중심으로 한 시장경제 지향 개혁을 추진했으며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피노체트가 칠레에서 경제개혁을 실시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칠레 출신 유명 문학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칠레가 아옌데 정권 시절에 이미 국제사회에서 굳건한 경제 기반을 가진 나라로 인정받았었다며 피노체트가 칠레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주장이 거짓말이라고 못박았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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