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잔재 청산, 냉전상징 카스트로와 역사속으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이 10일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60년대 이래 치열했던 냉전 하에서 군부 정권이 휩쓸었던 중남미는 80년대 들어 문민정부 수립에 이어 피노체트의 사망으로 군부독재의 잔재를 완전히 마감하는 시대를 맞았다.
특히 1973∼90년 집권한 피노체트의 사망은 피델 카스트로 쿠바 지도자와 더불어 21세기를 넘어 생존한 중남미 냉전의 좌우파 두 대표적 인물이 역사적으로 사라지는 큰 의미를 담고 있다는 평가다.
카스트로는 장출혈 수술로 1959년 이래 47년 집권기간 처음으로 권력을 이양한 지 4개월을 넘겼다.
쿠바 당국은 지난 2일 '카스트로 없는 카스트로 생일잔치'를 벌임으로써 그의 권력복귀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반증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피노체트는 카스트로와 절친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유혈 쿠데타로 몰아낸 장본인.
두 사람간 치열했던 '냉전 맞대결'은 그들의 국제적 명성을 높였다. 이들은 서로를 독재자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미 제국주의'에 끝까지 맞서는 인물로, 피노체트는 칠레를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구해낸 지도자로 각기 추앙받았다.
칠레 정치학자 파트리시오 나비아 교수는 "두 사람 모두 급진적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변화시켰고 대외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면서 "민주적이지 않은 두 지도자의 유산은 오랜 기간 주변을 맴돌 것이나 두 나라는 이들이 떠난 후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피노체트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수많은 시민들이 수도 산티아고 시내로 몰려나와 '열광의 춤판'을 벌였다. 시민들은 국기를 흔들며 군부통치 잔재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외쳤다.
중남미에 아직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스페인 정치권은 여야, 좌우 구분 없이 "피노체트의 사망에 결코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오히려 스페인 정당들은 '유혈독재'의 대명사 피노체트가 인권유린 사건으로 처벌되지 않은 채 타계한 데 유감을 표명했다.
런던 소재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는 피노체트 사망이 칠레와 다른 모든 정부에 인권유린 사건을 신속히 해결해 정의를 가져오도록 하는, 호텔의 '모닝 콜'처럼 주의를 환기하는 경고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피노체트 집권기간에 대한 평가를 유보한 가운데 80년대 피노체트와 함께 했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81) 전 영국 총리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며 조의를 표했다.
피노체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경제발전과 정치탄압'의 양극단 사이에서 진단된다.
피노체트는 국제적으로는 칠레를 자유시장주의 경제개혁의 모델로 발전시켰다는 공로로 칭송을 받는다. 그는 소위 '시카고 보이스'라는 미국 시카고대학교 출신 기술관료의 건의를 받아들여 민영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개혁 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이는 90년대 이래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됐다는 칠레 경제의 주춧돌이 됐다고 상당수 경제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피노체트 지지자 수천 명은 이날 피노체트가 사망한 군병원 주변에 모여들어 눈물을 흘렸으며 일부는 '피노체트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정치탄압 독재의 대명사'로 비난받는 피노체트는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도 각종 인권유린 사건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식 집계로도 피노체트 집권기간 3천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로 인해 1990년 물러난 피노체트는 98년 영국 방문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자신의 집권기간 인권유린 혐의로 가택연금과 기소를 쉴 새 없이 당했다.
피노체트에 대한 면책특권 박탈과 가택연금 조치가 수차례 내려졌으며 그의 부인과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은 지난해 탈세 공모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공산주의에 대항한 십자군으로 자처했던 피노체트는 자신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 "내가 지나쳤다면 신이 용서할 것"이라고 물러서야 했고 측근들에게 "죽고 싶다"며 자괴감을 표할 정도였다.
결국 피노체트는 지난달 '정치적 책임'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어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야 했고 91세 생일을 맞은 지 얼마 안 돼 눈을 감고야 말았다.
이와 관련, 칠레의 우고 구티에레스 변호사는 "이 범죄자(피노체트)는 자신의 독재기간 자행한 어떤 죄상에 대해서도 한 번도 처벌되지 않은 채 떠나 모든 인권유린 사건을 미해결 과제로 남겼다"고 지적했다.
피노체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경제발전과 정치탄압'의 양극단 사이에서 진단된다.
피노체트는 국제적으로는 칠레를 자유시장주의 경제개혁의 모델로 발전시켰다는 공로로 칭송을 받는다. 그는 소위 '시카고 보이스'라는 미국 시카고대학교 출신 기술관료의 건의를 받아들여 민영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개혁 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이는 90년대 이래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됐다는 칠레 경제의 주춧돌이 됐다고 상당수 경제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피노체트 지지자 수천 명은 이날 피노체트가 사망한 군병원 주변에 모여들어 눈물을 흘렸으며 일부는 '피노체트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정치탄압 독재의 대명사'로 비난받는 피노체트는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도 각종 인권유린 사건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식 집계로도 피노체트 집권기간 3천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로 인해 1990년 물러난 피노체트는 98년 영국 방문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자신의 집권기간 인권유린 혐의로 가택연금과 기소를 쉴 새 없이 당했다.
피노체트에 대한 면책특권 박탈과 가택연금 조치가 수차례 내려졌으며 그의 부인과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은 지난해 탈세 공모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공산주의에 대항한 십자군으로 자처했던 피노체트는 자신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 "내가 지나쳤다면 신이 용서할 것"이라고 물러서야 했고 측근들에게 "죽고 싶다"며 자괴감을 표할 정도였다.
결국 피노체트는 지난달 '정치적 책임'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어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야 했고 91세 생일을 맞은 지 얼마 안 돼 눈을 감고야 말았다.
이와 관련, 칠레의 우고 구티에레스 변호사는 "이 범죄자(피노체트)는 자신의 독재기간 자행한 어떤 죄상에 대해서도 한 번도 처벌되지 않은 채 떠나 모든 인권유린 사건을 미해결 과제로 남겼다"고 지적했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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