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수구명위원장' 유재건 의원-이철수씨 LA서 만나
21살의 나이에 갱단 살인 혐의로 체포돼 사형이 선고됐던 한인 청년과 그의 무죄를 믿고 6년여동안 온 몸을 던져 구명운동을 펼쳤던 법학도가 17년만에 감격적으로 다시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화제의 주인공들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소수민족 연대 승리라는 결과를 이끌어낸 유재건(69) 열린우리당 의원과 10년 2개월간의 20대 청춘을 험악한 교도소에서 보낸 뒤 1983년 누명을 벗고 자유의 몸이 되어 풀려나 화제를 모았던 이철수(55)씨. 이씨는 12살 때 홀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힘든 삶을 이어가던 중 1973년 6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갱단 피살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체포된 뒤 엉터리 재판 과정을 거쳐 1급 살인혐의로 1974년 6월 종신형이 선고됐던 한국 국적의 청년이었다. 더욱이 이씨는 교도소 복역중이던 1977년 자신을 살해하려는 백인 갱단을 정당방위로 맞서다 살해한 혐의로 제2의 재판이 진행돼 사형이 선고됐으나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청소년그룹이 무죄운동을 펼치는 것과 때를 같이해 새크라멘토 유니언 기자였던 이경원씨가 당시 연세대와 브리검영대 대학원을 거쳐 UC데이비스 대학원에서 법학박사를 따낸 유재건씨와 함께 사건을 파헤치면서 극적인 전기를 맞았다.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유 의원은 이씨를 면담한 뒤 1차 사건이 잘못됐음을 확신하고 1977년 `이철수구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때부터 재판 서류 등을 샅샅이 뒤져 이씨가 7가지 위헌적 재판 절차의 희생양이었음을 밝혀냈다. 이 사건은 이경원씨의 폭로 보도가 이어지고 일본 출신 란코 야마다씨 등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커뮤니티가 대대적으로 가세한데다 유명한 인권변호사 레오나드 와인글래스씨가 무료 변론을 맡았고 이씨와 비슷한 처지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한인들이 한푼 두 푼 쾌척해 20만 달러라는 값진 성금이 모아지는 등 미국땅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며 시작된 구명운동은 `무죄 석방'으로 확대됐으며 마침내 1982년 9월 3일 무죄평결이 내려지고 제2의 사건도 1983년 사형판결을 무효화함으로써 이씨는 지옥 같은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유 의원이 지난 1990년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은 7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이경원리더십센터' 주최로 열리는 "정의의 재판-이철수 구명운동 대토론회"에 참석키 위해 6일 LA 코리아타운의 윌셔플라자 호텔에서 반갑게 조우했다.특히 이씨는 1991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다리마저 불편해졌지만 생면부지의 자신을 위해 돈 한푼 받지않고 집까지 저당잡히며 봉사했던 유 의원의 손을 잡고 거듭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 의원은 "나와 이씨, 이경원 기자 모두가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처지였고 이씨와 이씨의 어머니를 만나고 난 뒤 재판 과정에서 무언가 크게 잘못됐음을 확신했으나 그때만 해도 무죄임은 확신하지 못해 일단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고 나섰고 이후 재판 서류를 검토하며 무죄임을 주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 의원은 "법을 공부하는 처지에 커뮤니티를 빌려 명성을 쌓으려 한다거나 죄지은 이를 무엇하러 도우려느냐는 반발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호전되고 도우려는 이들이 더 많이 나서면서 마침내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며 "특히 이 사건은 당시만 해도 무지했던 미국 법원 시스템을 교육하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 한인들이 기본 인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했고 코리언 커뮤니티의 울타리를 벗어나 아시안커뮤니티나 흑인, 백인 단체 등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첫 계기가 됐으며 이민자 100명 이상을 둔 학교에서는 이중언어 교사를 의무적으로 채용토록 하는 움직임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또 1983년 이씨 후원금 가운데 남겨진 7천400 달러는 주류 사회에 진출하려는 젊은이들을 도우려는 한미연합회(KAC) 창설 기금으로 전해졌고 KAC는 현재 미국 전역에 17개 지부를 둔 영향력 있는 단체로 성장했다. 이제 미국 시민권자가 된 이철수씨는 "유 의원은 진정으로 나를 위해 열심히 뛰었고 어머니와 함께 많은 눈물을 쏟았다"면서 "나를 도와주려는 이들이 있음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에 무죄임을 증명하려는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유 의원을 비롯해 자신의 석방을 위해 애써준 한인사회에 거듭 감사함을 표시하면서 "그런 도움에 어떤 방식으로든 보답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 늘 죄스러운 마음이다"고 밝혔다. 이씨 사건을 취재했던 이경원씨와 변홍진 전 미주한국일보 편집국장은 최근 2년동안 이씨와의 심층 인터뷰를 보충해 가제목 `Voice from the death row'라는 자서전을 무죄평결 25주년을 맞는 오는 9월3일 발간할 예정이다. 한편 7일 UCLA에서 열린 토론회에는 당시 변호를 맡았던 와인글래스와 스튜어트 헨론 변호사, 사립탐정 조시아 팅크 톰슨씨, 배심원 반장을 맡다가 무죄평결 이튿날 이씨 후원회 회원이 됐던 스콧 존슨씨 등이 대거 참석해 당시 사건을 재조명했다. 장익상 특파원 isjang@yna.co.kr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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